집과의 대화
나의 집에 대한 기억은, 엘리베이터도 없던 4층짜리 15평 빌라에서 시작된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처음으로 우리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던 그 집. 당시 나는 웨딩 관련 사업을 하고 있었고, 생활은 빠듯했다. 집은 나에게 사치처럼 느껴졌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나를 믿어준 아내는 기적처럼 “결혼하자”라고 말했다.
그렇게 부모님께 부탁해 얻은 작은 전셋집은 우리가 시작한 첫 번째 ‘우리 집’이었다. 아내의 자취방에서 가져온 소품들, 장모님이 마련해 주신 세탁기와 냉장고, 그리고 “밥은 안 해먹을 거니까 밥솥은 필요 없어”라며 웃던 초보 주부의 당찬 선언이 집 안 가득 떠돌던 시절.
며칠 뒤 우리는 결국 밥솥을 샀고, 그 밥솥은 늘 싱크대 위에 놓여 있었다. 작지만 따뜻했고, 불편하지만 사랑스러웠던 그 신혼집은 오늘날에도 내가 떠올리는 가장 ‘행복한 공간’이다.
그 시절, 나는 웨딩 산업이 쇠퇴하는 흐름 속에서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고,
새로운 길을 고민하다 인테리어 플랫폼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가 되기로 결심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임신 소식을 맞았지만, 불행히도 아내는 유산을 겪었다. 의사는 “몸이 지쳐있다”라고 했고, 아내는 “퇴근 후 4층 계단을 오를 때가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후,
나는 더 이상 그 집을 사랑할 수 없었다.
계단은 고통의 상징이 되었고, 우리는 이사를 결심했다.
새로 이사한 24평 신축 아파트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지하 주차장, 욕실 두 개, 방 세 개. 둘이 살기엔 넉넉한 공간은 우리에게 ‘안정’이라는 선물을 주었다.
인테리어 회사의 대표답게 나는 가구와 소품을 정성껏 배치했고, 아내는 매일 집을 닦고 또 닦았다. 그렇게 집은 ‘사랑’이라는 이미지로 완성되어 갔다.
그리고 우리 아들, ‘오늘’이가 태어났다.
낯설고 작은 생명체와의 동거는 때론 버거웠지만, 그로 인해 집은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아이의 소품들로 가득 찬 거실, 층간소음을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발걸음,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 된 가구 배치. 우리는 점점 ‘아이 중심의 집’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가 말을 하고 걷기 시작하면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 이사를 결심한다.
아내의 직장 근처, 육아 환경이 더 나은 곳으로. 집 앞에는 숲이 보였고, 아이와 손잡고 산책할 수 있는 동네는 또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
아내는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밥은 안 해 먹을 거야”라던 그녀는
이제 건강한 식단을 뚝딱 만들어내는 작은 셰프가 되었다.
예쁜 식기들이 점점 늘어나고, 식탁에는 가족의 대화가 쌓였다.
그 무렵, 우리는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에 무리를 해서 50평 오피스텔을 구매했고
인테리어를 다시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400채가 넘는 집을 설계하며 쌓아온 노하우를 우리 가족에게 가장 어울리는 공간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간을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나는 행복보다는 스트레스를 먼저 느꼈다.
그때 깨달았다.
집은 예쁘게 꾸미는 것이 전부가 아니구나.
중요한 건 우리 가족이 이 집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는가였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우리에게 집이란,
그저 사는 곳이 아니라 마음이 사는 곳이라고.
아이들이 달려와 안기는 현관의 순간부터,
함께 앉은 식탁의 온기까지.
집이라는 공간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을, 기억을, 추억을 담아내는지를 나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집과 ‘기능적 대화’가 아닌 ‘감정의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