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 시간에 안 자고 뭐 해?”
“응, 잠이 안 와서.”
엄마는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이따금씩 냉장고 청소를 하곤 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4인 가족의 끼니와 요기를 책임질 각종 채소와 과일, 밑반찬들이 언제나 그득했다. 지난 명절에 외할머니가 챙겨주신 얼린 제주산 고사리나물과 햅쌀로 만들었다는 가래떡, 아는 분이 산에서 직접 따다 주셨다는 귀한 오디 열매 등등. 엄마의 냉장고는 마치 ‘사랑 저장소’ 같았다. 누군가 엄마를 생각하며 건네준 사랑과 엄마가 가족들에게 만들어 건넬 사랑을 보관하는 곳. 하지만, 영원할 거라 믿은 그 사랑의 물성은 슬프게도 이내 변질되기도 한다.
“아이고~ 이거 아까워서 어떡해.
다 물렀네, 다 물렀어~”
“(킁킁) 이리 와서 이거 맛 좀 한번 볼래?
상한 것 같기도 하고…”
부엌 바닥을 뒤덮은 갖가지 식재료들 사이에서, 엄마는 마치 감자 캐는 농부처럼 쭈그리고 앉아 후각과 미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는 그것들의 상태를 판별해내기 바빠 보였다. 그 당시 나에게 냉장고는 그저 엄마의 ‘고유 영역’ 일뿐이었으므로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던 반응은 늘 한결같았다.
“아휴~ 엄마, 이거 언제 다 정리해! 안 먹는 건 그냥 다 버려요! 아까워하지 말고!”
<식재료를 구원하는 ‘냉파’>
그랬던 나도 시간이 흘러 어느덧 결혼 2년 차가 됐다.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매일 같이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제 일상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빨리 먹어 치워야 하는 반찬은 없는지, 당장 버려야 하는 썩은 식품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은 건너뛸 수 없는 일과다. 내가 일종의 체질 개선을 하게 된 이유에는 냉장고에 얽힌 크고 작은 일상의 공이 크다.
결혼 전 내게 냉장고는 그저 먹고 싶은 걸 보관해주는 하나의 장치였다. 입맛에 맞는 반찬이나 간식거리가 있으면 그뿐. 냉장고 안쪽 구석에는 어떤 반찬이 숨어 있는지, 채소 칸의 상추가 시들해지고 있지 않은지 따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탓에 냉장고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신혼 초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살 계획이 없었는데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쟁여둔 식재료, 나의 기호와 상관없이 양가 부모님께 받아온 각종 밑반찬들은 일단 냉장고로 직행했다. 그러다 문득 냉장고 문을 열 때 이미 다 물러버린 상추 이파리와 시큼한 냄새가 올라오는 엄마의 장조림을 발견하곤 했다. 어리석었던 나는 그때마다 이들의 부패를 슬퍼했다. 그랬다. 엄마의 냉장고 파먹기는 일종의 ‘구원’ 작업이었다. 썩어가는 것들을 향해 심폐소생의 손길을 내미는 매우 고귀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몇 차례 더 겪은 후, 부모님께 받아온 반찬은 아낌없이 먹으려 노력하고, 아무리 저렴해도 당장 먹지 않을 야채나 과일은 사지 않았다.
냉장고 파먹기를 시작하게 된 데 '작은 냉장고'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신혼집 옵션으로 딸린 냉장고는 냉장, 냉동 두 칸으로 이루어진 작은 크기의 냉장고였다. 더군다나 냉장실의 1/3은 연중 내내 큰 김치통이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냉장 칸은 딱 두 칸뿐이었다. 그래서 여름에 수박이라도 한번 먹으려면 우선 냉장고에 수박을 넣을 공간부터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마음껏 장을 보려고 해도 '지금 냉장고에 이걸 보관할 공간이 있나?'부터 생각하게 됐고, 장을 보기 전 기존에 있던 반찬이나 식재료를 사용하며 미리미리 여유 공간을 만들어 두는 습관이 생겼다(혹시 나와 같은 살림 초보거나 냉장고 정리가 어려운 성격이라면 작은 냉장고로 트레이닝받는 방법을 강력 추천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결정적인 계기는 ‘이사’다. 이사를 앞두고 나는 조금이라도 이삿짐을 줄이기 위해 본격적인 냉장고 파먹기에 돌입했다. 냉장고 크기가 작은 만큼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냉장고 파먹기는 파도파도 끊임없이 나오는 식재료에 예상보다 길어져서 장장 3개월 간 이어졌다. 가장 처치 곤란이었던 것은 한번 쓰고 마는 소스류였다. 팟타이를 해 먹을 때 넣은 스리라차 소스, 단호박 수프를 만들 때 사용한 코코넛 밀크, 매운 음식이 먹고 싶을 때 꺼내 쓰는 마라소스까지. 냉장고 문에 딸린 비좁은 칸 곳곳에 꽂혀 오랫동안 쓰임이 멈춘 것들이었다. 우선 모두 꺼내 유통기한을 확인하고 날짜가 지난 것들은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은 시야에 잘 들어오는 위치에 빼두었다. 이렇게 하니 잊혀진 소스를 더 자주 꺼내 쓸뿐더러, 특별한 날에나 먹을 법한 이국적인 맛이 식탁에 자주 올랐다.
<‘냉파’의 네 가지 원칙>
3개월간 냉장고 파먹기를 통해 나만의 냉장고 파먹기 원칙들이 생겼다.
첫째, 식재료는 가급적 내용물이 보이는 투명한 밀폐용기에 담아 보관한다. 식재료의 신선도를 높일 수 있고,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한눈에 보여 그 재료를 좀 더 빠르게 활용하게 된다.
둘째, 유통기한이 임박하거나 빨리 먹어야 하는 음식들은 눈에 잘 보이는 앞쪽 칸에 놓아둔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그 재료를 빨리 먹어야 한다는 생산적인 압박감이 생긴다.
셋째,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파악해 주간 식단표를 작성한다. 사실 김치 하나만 있어도, 기름에 볶아 설탕만 뿌려주면 근사한 볶음 요리를 만들 수 있다. 식재료를 사기 전 현재 갖고 있는 재료를 쭉 적어보고 메뉴를 미리 생각해보면 굳이 장을 보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높다. 식재료들을 요리조리 조합하다 보면 나만의 집밥 레시피도 완성할 수 있다.
넷째, 손이 안 가는 식재료는 과감히 나눠준다. 평소 잘 먹지 않는 재료인데 몸에 좋다고 들어서, 언젠가는 쓸 것 같아서 쟁여둔 것들은 결국 끝까지 안 먹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쓰지 않을 식재료는 그나마 좀 더 신선할 때 지인들에게 나눠주거나 밑반찬으로 만들어 줬고, 나눔의 기쁨은 덤으로 따라왔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것에 앞서 가장 명심해야 할 사실은 '냉장고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는 명제 아닐까. 마치 냉장고에 넣어두면 영원히 보관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냉장고에는 생을 마감한 것들만 들어간다. 그래서 냉장이든 냉동이든 그 속도가 잠시 지연될 뿐, 식재료들이 부패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미 생을 다한 것들에게 썩어 소멸하는 것 외의 가치를 부여해주는 ‘구원’ 작업. 그래서 우리들의 ‘냉장고 파먹기’는 고귀하다.
* 본 게시글은 필자가 22년 8월호 여성동아 매거진에 기고한 푸드 에세이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