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어서오고!
서울에서 태어나 초, 중, 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내게 '독립'이라는 단어는 너무 먼 단어였다. 그치만 주변에 자취를 하며 자유롭게 일상을 가꿔나가는 친구들은 언제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을 보다 어렵게 꺼낸 나의 독립 얘기에 부모님의 반응은 늘 한결같았다. "뭐 하러 두 집 살림으로 돈을 낭비하니?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우리랑 살 때 저축이나 해둬라!" 틀린 말 하나 없는 이야기라 독립 실현에 대한 마음은 매번 고이 접어두었지만, 늘 내 마음속엔 독립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러던 내가 어느새 결혼을 두 달 앞두고 있었을 때였다. 신혼집은 바로 입주가 가능한 상태였고 말로만 듣던 결혼 준비의 빡빡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던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척 지쳐있었다. 하필 서쪽 끝과 동쪽 끝에 위치한 회사와 집의 거리에 나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출퇴근길마다 열리는 9호선 헬게이트에 신물이 난 나는 '그냥 부모님께 미리 신혼집에 들어가 산다고 할까...?'를 고민하며 언제 말씀드릴지 또다시 타이밍을 엿보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부모님과 여동생 모두와 저녁 식사를 하던 날, 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밥을 먹던 동생은 "언니, 살이 왜 이렇게 빠졌어. 많이 힘들어? 신혼집에서는 회사까지 20분밖에 안 걸린다며? 그냥 먼저 들어가서 살아! 엄마, 아빠, 언니 먼저 신혼집 들어가서 살라고 해!" 동생의 말에 엄마의 반응은 단호했다. "안돼, 아직 결혼식도 안 올렸잖아!" 조선시대도 아니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동생이 한 소리를 얹으려는 찰나... 엄마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울먹거리며 말했다. "이제 언니랑 같이 한 집에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왜 그러니 진짜! 엄마 요즘 너무 속상하다고!" 밥을 먹던 엄마도, 나도 눈물바람이 되고 말았고 그날 이후로 나는 결혼식 전날까지 군말 없이 9호선 출퇴근을 성실히 수행하는 딸이 되었다.
그렇게 결혼 전 미처 짧은 독립도 경험해볼 새 없이 시작된 신혼집 라이프는 역시나 우당탕탕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어차피 결혼하면 원 없이 하게 될 거라며 집안일을 거의 시키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하면 불효 같고 부끄럽지만) 부모님의 뒷바라지로 결혼 전까지 밥도 할 줄 모르고 화장실이나 싱크대 물때 따위 걱정하지 않고도 잘 살았던 나와 남편은, 여기저기서 터지는 살림의 구멍에 한동안 매일 정신이 혼미했다. 그리고 그중 탑 오브 탑은 바로 <솜이 왜 여기서 나와?> 사건이다.
새 수건과 새 이불, 새 침대커버.. 매일 쉴 틈 없이 세탁기와 건조기를 가동하던 우리는 어느 날 "필터를 청소해주세요"라는 건조기의 알림에 필터를 열어 보았다. 그런데 필터 안에는 들실과 날실로 견고히 짜인 '두터운 솜'이 보였다. 너무도 견고하고 반듯한 직사각형 자태에 우리는 "이게 뭐지? 이중 필터인가?" 하며 온라인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바로... 엄청난 섬유 먼지 덩어리임을 깨달은 우리는 한참을 웃다가, 경악하다가, 다시 웃다가 늦은 새벽까지 충격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외에도 쌀벌레(일명 바구미) 사건, 진미채 실온 보관 사건, 세면대 머리카락 사건... 휴... 진땀이 나던 순간들은 아주 많다.
결혼 전 미리 자취를 해보았더라면 이런 진땀 나는 순간들에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 까? 매일 새롭고 짜릿한 집안일의 세계에서 우리는 또 어떤 신박한 난관을 겪게 될까? 물론 미리 독립을 경험했더라면 새댁으로서의 좌충우돌도 덜했을 테지만, 뭐든 때가 있기 마련이니 이렇게 하나씩 배워가는 것도 재미있다. 그렇게 오늘도 나와 남편의 인스타그램 DM 창에는 온갖 살림 아이템 광고글이 쌓여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