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의 덫

숫자와 성취에 매달리다 놓친 것들

by 문과체질 이과생

처음의 안정감

처음에는 욕심이 없었다.

그저 하루가 무너지지 않게

내가 회복할 수 있게

오늘의 시간을 충분히 마무리하자는 마음뿐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나면

연구실에서 집까지 몇 정거장을 걸었다.

오른편에는 이제는 쓰이지 않는 오래된 군부대가 있었고,

여름 저녁이면 그곳에서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풀벌레 소리가 귀를 간질이다가,

조금 더 걸으면 차가 막히는 구간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은 바쁘게 흘러가는데

나는 오롯이 걸음의 리듬에 나를 맡길 수 있었다.


다리를 지나 물이 흐르는 길을 바라보면

오늘도 저녁을 먹고

다시 이곳에 나와

몸을 움직일 수 있겠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하루가 정돈되는 기분이 들었다.

집이 가까워지면,

부모님과 고양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상상이 나를 미소 짓게 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구제되고,

내일의 나를 준비할 수 있었다.



자유에서 의무로

그러나 사람은 초심을 지키기 어렵다.

감사했던 마음은 점점 변질되었고,

몸이 기억한 감각은 곧 숫자가 되었다.

3km의 충분했던 달리기는 10km가 되었고,

10개의 턱걸이는 어느새 100개가 당연한 약속이 되었다.

“이 정도는 해야지.”

어제를 채워야 오늘이 허락되고,

오늘을 채워야 내일로 넘어갈 수 있는 구조 속에서

나는 숫자의 뒤꿈치를 헉헉대며 쫓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10km 달리기와 100개의 턱걸이를 했던 것은 아니다.

10km 달리기와 100개의 턱걸이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나는 실험동물을 부검하는 일이 심리적으로 힘들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많은 양의 실험동물을 부검하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방문을 굳게 잠그고 내부의 불을 모두 끄고

이불속에 오래 누워 있는다.

그러면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피와 배설물의 냄새가

죄책감이 되어 마음을 짓눌렀다.


그런 날의 달리기는 일종의 속죄였다.

고통을 몸으로 감내해야 마음의 짐이 덜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심적으로 가장 힘든 날에 오히려 10km를 채웠고,

그 끝에 느낀 것은 고통이 아니라 안도였다.

다행이라는 감정뿐만 아니라 스스로 위안을 느꼈다.


턱걸이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에 100개를 한 것은 아니지만,

5개씩 쌓아 올려 결국 100개에 다다랐을 때,

누구나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믿었다.

대학원에서 능력을 의심받고 좌절할 때면 꼭 100개를 채웠다.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가 무력하지 않다확신을 얻었다.


운동에 익숙해진 나의 몸은 금세 적응했고,

달리기와 턱걸이는 더 이상 벅찬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10km와 100개는 ‘가능한 일’이 되었다.

문제는 가능한 일이 곧 기준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안심믿음을 얻기 위해 시도한 것들이

매일의 의무가 되자 성취의 빛은 서서히 바랬다.



과한가, 당연한가

퇴근 후 저녁 여덟 시 정도에 운동을 시작해서

달리기와 턱걸이를 마칠 즈음에는

더 이상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해냈다”는 성취감은 점점 사라졌고,

그 자리를 “오늘도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문장이 차지했다.

비가 오거나 약속이 있는 날에도 기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젖은 운동화를 신고 달리거나,

늦은 밤 몸을 이끌고 나가야만 마음이 놓였다.


매일매일 내게 주어진 할당량을 완수하던 중,

“하루 10km에 턱걸이 100개?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가족의 걱정 어린 말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건 무리 아냐?

친구들도 내 기록을 듣고는 걱정하는 어투로 말했다.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을 내뱉고 나서도

이상하게 가슴에 응어리가 남았다.

정말 이것이 ‘해야만 하는 일’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질문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회복을 위한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운동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풀벌레 소리와 바람만으로도 충분했던 시절

언제부터 숫자와 성취로 하루를 증명하는 시절로 바뀌었을까.



한 발 물러서며

그제야 몇 가지 사실을 또렷하게 마주했다.

자극은 시작을 돕지만, 지속을 설계하지는 않는다.

숫자는 기준을 주지만, 몸의 언어를 번역하지는 않는다.

기록은 성실을 보여 주지만, 삶의 균형을 판정하지는 않는다.


숫자가 위로가 되는 동안,

나는 오히려 위로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저녁 시간을 채운 날보단

채우지 못할 수도 있는 내일이 더 두려워졌고,

나는 자극에 빚을 지고 있었다.


어느 날,

운동화 끈을 매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늘은 뛰지 않고 걸어도 괜찮을까.

그날 나는 뛰지 않고 걸었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오래 준비되었던 생각이

조용히 내게 촉매가 되어 주었을 뿐이다.


걸음을 옮기며 깨달았다.

자극은 날카롭고 화려하지만, 지속은 둥글고 검소하다.

화려함은 기록에 잘 남지만, 검소함은 생활에 오래 남는다.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하려 하는가.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나는 오늘, 채우지 않는 쪽으로.

그러나 무너지지 않는 쪽으로 한 발 물러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