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춤이 가르쳐준 것
속도를 늦추자, 보이기 시작했다
멈춤의 순간
뛰지 않고 걸었던 그날,
그 작은 선택에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가 다시 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던 그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나는 끈을 고쳐 매던 손을 멈추고 달리기 대신 걷기를 택했다.
달리기 앱을 끄고 기록을 남기지 않기로 했다.
그날의 선택은 낯설었고 동시에 마음은 가벼웠다.
보이지 않던 풍경들
그날은 유난히 잔잔한 저녁이었다.
붉은 석양이 가라앉고,
청록빛 하늘이 서서히 어둠에 녹아들던 시간.
늦여름의 가장자리에서 가을바람이 살짝 스며들었다.
걸음을 옮기자 서서히 풍경이 달라졌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옆길을 따라 졸졸 흐르는 물소리.
터널을 빠져나오자 물 위로 오리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아기 오리들의 작은 물결이 반짝였다.
고개를 드니 오른편에 둥근달이 강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빠르게 달릴 때는 스쳐 지나가던 것들이
천천히 걷자 한 장면씩 또렷이 박혔다.
빠르게 움직이면 하나의 배경으로 뭉개지던 것들이
발을 늦추자 각각의 표정을 드러냈다.
지브리 영화 한 장면이 잠시 현실이 된 듯했다.
나는 속도를 줄였을 뿐인데 풍경이 나에게 다가왔다.
몸과 마음의 회복
내가 옮기는 걸음걸이마다 심호흡이 깊어졌고
무릎과 어깨가 나지막이 숨을 내쉬는 듯했다.
한동안 경직되고 굳어 있던 나의 마음이
오리와 강아지를 바라보는 순간 스르르 풀렸다.
나의 판단의 기준이 다시 돌아오는 듯했다.
한동안 나는 ‘얼마나’라는 말에 더 익숙했다.
몇 분, 몇 걸음, 그리고 얼마나 거칠게 호흡했는가.
하지만 걸음으로 바꾸자 질문도 달라졌다.
‘어디에 서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마음인가.’
성과 대신 자각이 내 마음의 중심이 되었다.
멈춤이 남긴 가르침
달릴 때의 호흡은 박자를 잰다.
하지만 걷기에서의 호흡은 공간을 잰다.
숨을 들이쉴 때 강 냄새가 들어오고 내쉴 때 어깨의 긴장이 조금 풀린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호흡을 한 번 더 고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배웠다.
삶에도 이런 템포가 필요하다는 걸 그때 이해했다.
나는 내 주변의 관계들과 변화들 그리고 나를 대표하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관찰한 관계에는 거리감이 있다.
보도 위를 걷는 사람들의 간격, 산책 중인 이들의 보폭.
모두가 자기 리듬을 갖고 있었고
그 리듬이 서로에게 무례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만든다는 걸 보았다.
내 주변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너무 가까이 붙을 때 생기는 오해, 너무 멀어질 때 생기는 무관심.
멈춤은 타인과 나를 구분하는 얇은 선을 그어 주었고,
그 선을 통해 거리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한 발 뒤에서 바라보는 시점,
그곳에서야 비로소 상대의 숨소리가 들리고 나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해진다.
빠를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멈추면 초점이 넓어진다.
이전에는 지나쳤을 작은 변화들.
결과만 보던 눈이 과정의 작은 어긋남을 포착했다.
작은 어긋남을 포착하는데 끝나지 않고
작은 변화들을 인지하고 내 삶에 적용시켰다.
속도를 줄이니 수정이 쉬워졌고, 수정이 빨라지니 오히려 삶이 단단해졌다.
멈춤은 삶을 늦추기보다 낭비를 줄였다.
뭔가를 꾸준히 하는 것에는 성격이 한몫했다.
'성실'
내가 어느 집단에 머물러도 그 단어는 항상 나를 대표하는 단어다.
물론 이 단어가 나를 지칭하는 나쁜 언어는 아니다.
하지만 '성실'은 때로 나를 몰아붙이는 도구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열심히’라는 단어가 항상 나를 뒤쫓았다.
잠깐이라도 멈추려고 할 때면 이 단어들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성실'하고 '열심히'했을 때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나를 심하게 자책하게 된다.
그 문제가 나에게 있지 않음에도 결국 화살을 나에게 돌린다.
다행히 나이가 든 이후에 멈춤은 그 '성실'을 '돌봄'으로 변환시켰다.
벤치에 잠시 앉아 신발끈을 다시 묶으며, 나는 다짐했다.
내일의 나에게 과제를 남기는 대신, 오늘의 나에게 여유를 남기자고.
못한 것을 탓하는 대신, 내가 한 것을 알아차리자고.
그 작은 태도 변화가 마음의 소음을 줄였다.
모두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
달리기만이 정답이 아니듯, 항상 최대로 밀어붙이는 것만이 삶은 아니다.
때로는 최소로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나를 더 멀리 데려간다.
나는 시간을 보지 않고 발걸음의 길이만으로 길을 재고 있다.
누가 보지 않아도, 기록에 남지 않아도, 내 삶은 진행형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믿고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멈춤은 패배가 아니라 방향의 회복이다.
멈추어 본 사람만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다.
멈춤은 단순한 쉼이 아니다.
나를 돌아보고 방향을 바로잡는 동작이다.
너무 서두르면 시야가 좁아지고 실수가 늘어난다.
사람 사이에서도 앞만 보고 달리는 태도는 관계의 여백을 사라지게 한다.
걷는 동안 나는 그 사실을 다시 배웠다.
멈추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숫자의 뒤꿈치를 쫓으며 오늘도 내일도 지쳐갔을 것이다.
멈춤은 나를 처음의 자리로 데려다주었다.
멈춤으로써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