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 공놀이를 잊지 못한 사람들
야구팬들에게 봄은 축제다. 일주일만 지나도 분노하고 짜증 내겠지만, 겨우내 잠들어 있던 응원 욕구가 샘솟는 건 막을 수 없다. 옷장 속 깊숙이 넣어둔 유니폼을 꺼내고 때론 새 시즌 상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올해는 어떤 선수의 등번호를 새길까 고민하며.
그런데 이번 봄은 그 어느 해보다 조용하고 차분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16강 진출로 성공을 거뒀다. 매년 치솟던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인기는 정점을 달렸다(현재는 여러 잡음에 시달리고 있기는 하다). 그 바통은 야구 대표팀에게 전달됐다. 2017년 이후 6년 만에 열리는 2023 WBC를 앞뒀기 때문이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줄여서 WBC는 미국이 야구의 세계화를 목표로 내건 야구 국제 대회다. 특히 이번 WBC는 전 세계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한 '야구판 월드컵' 그 자체였다. 한국야구협회 KBO는 시들어가던 야구 인기를 반전시킬 비장의 카드로 WBC 성공을 제시했다. 축구의 성공을 야구에서도 이어가겠다는 생각.
모두가 알다시피 그 카드는 갈기갈기 찢겼다. 호주전 패배, 일본전 대패로 한국야구에 대한 여론은 전에 없이 차가워졌다. 야구계 내외의 날카로운 비판은 선수들뿐 아니라 야구를 좋아한다 자부하던 팬들의 마음에도 큰 상처를 냈다. 다행이라면, 바닥을 마주했으니 변화하리라는 기대감이 생겼다는 점뿐이었다. 김광현, 김현수, 양의지 등 베테랑 선수들은 이번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택했다. 쫓겨나듯 말이다. 도망가는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던데, 너무도 가혹하지 않나 싶다.
야구에 진정한 위기가 찾아왔다는 분석이 이어졌다. 야구를 대체할 재미있는 것들이 전보다 훨씬 많아졌고, 그 사이 야구는 경쟁력을 잃었다고들 했다. 거기다 크고 작은 사건들도 발생했다. 2000년생 투수 서준원은 미성년자 성범죄 혐의로 롯데에서 방출됐다. 삼성 외야수 김헌곤은 가족에까지 악플 세례를 일삼던 일부 악질 네티즌을 고소했다. 前 KIA 타이거즈 단장 장정석은 선수에게 뒷돈을 요구했다는 혐의로 팀에서 해임됐다.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현직 프로야구 선수의 불법 온라인 도박 신고가 KBO 클린베이스볼 센터에 제보됐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이 모든 일이 한국의 WBC 참패 이후 한 달 안에 벌어졌다. 나도 야구 인기에 큰 타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023 시즌 개막은 축제가 아닐 것 같았다.
결과는 어땠냐고? 올시즌 프로야구는 전에 없던 호황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개막 5경기의 티켓이 모두 팔렸다. 인천과 잠실에서 열린 경기는 그다음 날까지 매진이었다. 특히 지난해 우승팀 SSG 랜더스는 역대 인천 연고팀(삼미, 청보, 태평양, 현대, SK)을 통틀어 최초로 개막 2연전 매진에 성공했다. 전문가들과 언론이 지적하던 '인기 하락'과는 거리가 있었다. (나도 인천의 이틀 연속 매진에 일조하긴 했다.)
여전히 '그깟 공놀이'를 잊지 못한 이들이 많다. 야구의 세계대회 실패에 속상해 웅크리고 있었을 뿐, 언제든 야구장을 찾아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이들. 야구팬들은 기꺼이 위로의 손길을 건넸다. 계속 응원할 테니 달라진 모습을 보여달라고,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이 문화에 느끼는 감정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한국야구의 41번째 이야기, 2023년은 그렇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