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속에서
중학교 시절 도덕 선생님 한분에 대한 이야기다. 항상 땀냄새와 향수가 오묘하게 섞인 고약한 채취가 교실에 진동했다. 선생님은 까무잡잡했고 파일럿 안경테를 착용했으며 헐렁한 남방만을 고수하여 은둔 철학자 내지는 자유인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우리는 그 선생님을 변태라고 불렀다. 이름에 '태'가 들어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게스름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상당히 민망할 정도로 느끼했고, 그 눈빛은 기가 약한 여자애들 쪽으로 향했다. '어유 변태새끼 또 시작이네' 우리는 키득댔다.
나는 그 눈빛을 보며 혹시 신내림을 받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흠집자국이 선명한 안경 렌즈에 비친 반사광이 눈 가운데로 정확히 자리할 때면 기괴해 보이면서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한 '라이트 온' 상태에서 수업을 하는 건지 계시를 읊는 건지 도덕의 도자(字)도 생소한 갓 입학한 중학생들에게 공자니 노자니 소크라테스니 이름부터 머리 아픈 철학자들의 말을 줄줄 읊어댔다.
수업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질 않았다. 자비롭게(?)도 선생님의 시험은 오픈북이었다. 나중에 시험이 끝나고 내 주변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말하길 수업 시간에 다룬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헛소리 딴소리 우직하게 하나하나 받아 적은 내가 바보였다. 역시나 첫 중간고사에서 40점이 나왔다. 도덕은 포기했다. 펜을 필통에 고이 모셔두고 꾸부정한 자세에 팔짱을 꼈다. 이 선생님의 수업만큼은 헐렁하게 듣기로 마음먹었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말했더랬지. 네 꼬락서니를 알라고." 졸고 있는 아이, 떠드는 아이, 눈이 반짝이지 않는 모든 아이들을 세워다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설파했다. 네 꼬락서니를 알라.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앎의 전제 조건이라 생각했던 그 말. 스스로의 무지를 알고 있음을 깨달으라는 그 말. 실제 소크라테스가 말했는지 아닌지도 불분명하지만 도덕 선생님 버전의 '네 꼬락서니를 알라'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작은 울림을 준다.
익숙한 행동, 자연스러운 생각,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 대한 거부감 없는 수용까지. 그래서 우리 일상은 단조롭고 지루하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 고찰할 시간도 여유도 자각도 없다. 그리고 심한 권태감이 일상을 지배할 때 즈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권태로운 삶은 그것을 깨 부수로 헤쳐나갈 의지도 용기도 없다. 주변만 계속 탓하기 시작한다. 악순환이 지속된다.
인간이기에 권태로울 수밖에 없고, 권태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되도록 방치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권태로 몰아가는 행동은 폭풍 속에서 배가 알아서 표류하게끔 조타를 놓아버린 술 취한 선장의 행동과 매한가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순간순간의 적확한 인식과 대응이 어제와 다른 삶을 만들어 낸다. 권태 극복의 첫걸음이다. 환경은 매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가끔은 '저는 그런 것을 생각 안 해도 매일 새롭고 재밌어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유전적으로 행복하도록 타고났거나, 무의식 수준에서 주변과 적극 교류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의식 수준에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해 잘 알아가려는 노력. 그리고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 권태로운 일상을 끝내고자 한다면 시작점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