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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T의 도로주행시험

by 샤토디

몇 년 전 이야기다.


나는 비교적 교통이 좋은 곳에 거주하는 덕에 자가용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버스 타면 되지, 지하철 타면 되지, 걸어가면 되지. 소위 BMW(Bus, Metro, Walk) 애용자였다.


어느 날, 자가용을 구매한 친한 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형 나 차 뽑았잖아. 근데 후회하는 게 있어."

"뭔데?"


나는 속으로 '거봐 유지비가 많이 들지?'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동생의 대답은 달랐다.


"진작 뽑을걸 괜히 고민하다가 너무 늦게 뽑은 것 같아 내 차가 있으니까 너무 좋아"


실용주의, 효율성 끝판왕인 친구가 저런 말을 하다니. 내가 세상을 너무 몰랐던 건가? 팔랑귀인 나는 차를 사야겠다 생각했다. 나는 곧바로 운전면허학원에 등록하였고 시간 날 때마다 짬짬이 시수를 채워 도로주행시험만 앞두고 있었다.


이윽고 시험날이 왔다.

시험 차량에는 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 그리고 중년으로 보이는 감독관 셋이 탑승했다. 먼저 동승여성이 주행을 시작했다. 감독관은 여성의 핸들을 대신 잡아주기도 하고 시험 중에 코칭도 직접 해주셨다.


"여기서 깜빡이 키시고"

"다음 좌회전이니까 왼쪽으로 붙이시고"

"속도 너무 빠르다 천천히 천천히"


나는 감독관이 참 친절하구나 생각을 했다. 이 정도면 떨어질 수가 없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여성은 감독관의 기대와는 달리 도로 한가운데서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바로 탈락했다. 감독관은 다음에는 꼭 붙을 거라며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도 약간의 어드바이스는 받을 수 있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감독관은 나에게는 그렇게 혹독할 수 없었다. 어설프게 브레이킹을 하거나 차선변경 타이밍을 놓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급기야 누구한테 배웠냐며 자기한테 배우면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며 동료들을 무시하는 발언들도 서슴지 않았다. 아까 그 스위트한 감독관은 어디로 간 거지? 긴장감은 더해져 갔다.


그러던 중 주황색 불이 켜졌을 때 갈까 말까 고민하다 횡단보도 위에 정차했다. 감점도 아니고 그냥 탈락이었다. 감독관은 신나게 나의 운전에 대해 혹평을 가했다. "에이 거기서 그냥 빨리 액셀을 밟고 나갔어야지 그렇게 운전하면 사람 쳐 나참"


시험에 붙었다면 에이 그냥 그런가 보다 넘어갔을 일들이었다. 그런데 허무하게 떨어지고 나니 감독관의 태도에 슬슬 열이 받기 시작했다. 감독이 한마디 더 하는 순간 나도 쏘아붙였다. 나는 분명 연수받을 때 이렇게 배웠다. 감독관님 동료분이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왜 응시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다른가. 왜 응시자의 핸들은 잡았는가. 시험 중에 코칭을 왜 한 건지. 이거 문제 되는 상황인 거 아시는지. 그리고 말씀을 지나치게 편하게 하시는데 듣기 민망하고 불편한 것 아시는지. 평소에 얌전히 말을 삼키는 사람이라 훈련이 덜 됐나? 말하는 동안 가슴이 콩닥콩닥했고 숨이 가빠왔다. 감독관은 아차 싶었는지 그제사 다 잘되라고 한 말이었다는 둥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는 둥 억지로 해요체에 담아 툭 던지듯 대답했다.


은근한 차별은 어디에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직접 대놓고 당해보니 억울했다. 뉴스에서만 봤을법한 성에 따른 차별을 여기서 당하는구나. 그것도 동성한테. 남성이 여성에게 보이는 배타적 호의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지만 그 반경 내에 발을 걸치고 있으면 누군가에겐 의도치 않은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친구한테 했다. 친구가 말했다.


"야 네가 감독관한테 코치받았으면 합격했을 것 같아?"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감독관이 옆에서 쫑알거려도 횡단보도 위에서 정지한건 내 잘못이었고, 그것은 감점 없이 바로 탈락이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냥 나는 분노할 대상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똑같은 친절을 베푸는 것이 의무가 아니니까. 그냥 떨어진 게 화나고 속상했던 것이다. 나는 어설픈 T다. 그냥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는데 왜 이제야.


누구나 일이 제대로 안 풀리면 기분이 좋지 않다. 그 순간 냉정한 사고회로는 작동을 멈추는 경우가 많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 이후로 이따금 감정이 올라올 땐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어떠한 의미부여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감정은 백 프로 사실이지만 생각은 내 감정에 놀아나기 때문이다. 씁쓸한 경험이었지만 나에겐 소중한 경험이었다.


아무튼. 고된 역경(?) 끝에 합격했고 지금은 차를 잘 몰고 다닌다. 이렇게 좋은걸 왜 이제야 장만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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