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열었다. 식재료가 한가득 하다. 대강 냉장고의 용량을 생각하지 않고 먹고 싶은 것들을 가득 사다 넣어놨더니 처치가 어렵다. 버리기엔 조금 아깝지만 먹어치우기까진 몇 날 며칠이 걸릴 것 같다. 부모님한테 절대 냉장고를 채우지 마시라 해도 이따금 집에 오면 식재료가 한가득 들어차 있다. 설 익은 김치도 어느덧 묵은지가 되었다. 팽이버섯도 끝부분이 말라비틀어져 있고, 마늘도 다져놓지 않았더니 끝부분에 곰팡이 생기는 것 같다. 항상 주말에 냉장고를 정말 비워야겠다 생각하지만 퇴근 중 먹고 싶은 것을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언가가 하나씩 주렁주렁 사들고 온다. 그날 저녁식사 후 남은 식재료 친구들은 언제 나에게 먹힐지 모른 채 춥고 어둠 컴컴한 상자 안에서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만약 냉장고에 고기가 남아 있다면 얼른 해치워야지 생각을 한다. 경험상 신선야채들보다 더 빨리 수명이 다하는 것 같다. 품질을 포기하고 냉동실에 넣어 수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지만 그런 친구들은 더 이상 고기가 아니고, 고기 역할을 하는 국거리일 뿐이다. 그런 친구들은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또는 부대찌개에 투척한다. 기름이 빠지고 적절히 색깔이 입혀진 국거리용 고기. 한 입 떠서 입에 넣으면 김치의 시큼한 향이나 된장의 구수한 향, 또는 스팸에 절여진 조미향들이 고기 역할의 국거리에 스며들 뿐이다. 고기 맛이나 질감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냥 너는 떡국의 고명이고 냉면의 삶은 달걀일 뿐이니까.
추석 연휴 오랜만에 대청소를 시작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얼른 자기 차례가 오길 바라는 고기류가 한데 있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 이번 추석은 집밥을 먹으며 식재료를 소진하자 생각했다. 냉동고기가 될 필요 없이 넌 바로 해치워줄게 하는 마음으로 인덕션에 팬을 올리고 고기를 몇 점 올려 굽기 시작했다. 환풍기의 팬을 최대한 돌려도 기름을 한껏 머금은 연기는 집안 사방으로 퍼졌다. 바닥이 금세 미끈미끈해졌다. 동시에 고기도 노랗게 잘 익혀졌다. 프라이팬을 기울이니 고기도 경사를 따라 쭉 떨어졌다. 이보다 고소할 수 있으랴. 밥과 김치와 나물, 양념장과 함께 드는 고기는 역시 맛있었다.
저녁에 아버지가 왔다. 아버지는 이따금 내 집에 와서 식사를 직접 준비해 주신다. 냄비에 각종 야채를 넣고 찌개 준비를 하시다가 돼지고기 고기를 찾았다. 저번에 오셨을 때 사서 넣어놨는데 혹시 내가 먹었는지 물었다. 나는 그게 아버지가 사놓고 가신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점심에 구워 먹었다고 말씀드렸다.
- 그거 국거리야 구워 먹으면 퍽퍽하고 질길 텐데
나는 비닐쓰레기를 모아놓은 봉투에서 랩에 붙어있는 태그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국거리용' 맞다. 국거리용이었다. 내가 국거리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로 냉동실에 넣어놨을 텐데. 구워 먹기 좋게끔 평편하게 잘라져 있어서 당연히 구이용인줄 알았다. 그런데 국거리용을 구워 먹어도 맛은 정말 훌륭했다. 퍽퍽하고 질긴 느낌도 전혀 없었고 오히려 두꺼워서 식감도 괜찮았다.
아버지는 냉장고에 있는 구이용 고기를 냄비에 넣었다. 이름 모를 찌개가 완성되었다. 고기부터 한술 뜨니 내가 평소에 먹던 아버지용 찌개 맛이 그대로였다. 구이용 고기를 찌개에 넣었는데도 거슬림 없이 찌개 양념과 잘 어우러져 입안에 싹 돌았다. 찌개에 들어간 고기가 구이용인지 몰랐다면 나는 이 고기를 국거리용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인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민감하지 않은 것인지. 아버지께서 손수 차려주신 저녁식사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맛있었을 것이다. 아무렴 국거리용이면 어떻고 구이용이면 어떤가. 냉장고에 고기가 차지했던 자리가 비어 조그마한 공간이 생겼다. 이제 저기에 무엇을 채워 넣고 다시 그것을 언제 소진할지 고민할 차례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