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감자전

by 천둥

하지 전에 감자를 한 박스 샀다. 포슬포슬하게 쪄서 뽀얀 감자를 소금에 콕 찍어 먹을 생각에 콧노래를 흥흥거렸다. 감자 몇 알을 손으로 북북 씻었다. 아직 껍질이 연해서 수세미로 씻으면 안 된다. 된장에 넣거나 볶아먹을 때는 껍질이 군데군데 남아도 되지만 쪄먹을 때는 껍질째 먹는 맛도 있고 얇은 껍질을 벗기는 재미도 있으니까 적당히 씻어야 한다.

밥 위에 얹어 폭 쪘다. 식구들에게는 밥을 한 공기씩 퍼주고 나는 반 공기만 푼다. 그리고 밥알이 군데군데 붙은 감자를 양푼에 담아낸다. 식구들 원성이 자자하다. 밥 한 자의 특권이다. 포실한 감자를 양껏 먹는다. 그렇게 며칠 먹고 나면 감자 박스는 한쪽으로 밀려난다.


어느 날, 푸대에 흙을 담아 감자를 키우는 사진을 봤다. 땅이 부족한 도시농부들이 궁여지책으로 심은 것인데 그게 어찌나 낭만적으로 보이던지. 나도 해봐야지, 마음이 동해서 열심히 푸대에 흙을 담고 감자를 잘라 심었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는 깜빡 잊고서. 푸대에 흙을 담았으면 땅에 심을 때보다 더 자주 물을 주고 관리를 해야 하는데 그대로 내팽개쳐두었다. 감자 꽃이 피는 것만 감상하면서. 남들이 쭈그려 앉아 감자를 캘 때 나는 호기롭게 푸대를 엎었는데, 심은 감자만 한 알감자만 몇 개 건졌다. 아, 역시 아름다운 것은 슬프다. 그 뒤로 감자는 심어 먹는 게 아니라 사서 먹는 작물이 되었다.


비가 오면 밀어두었던 감자박스가 다시 생각난다. 이번에는 굵은 소금 훌훌 뿌려 감자만 한 솥 찐다. 짭쪼름한 감자 누룽지가 생기게 물기를 바짝 졸인다. 뜨거운 감자를 헙, 한 입 물고 쏴, 쏟아지는 비를 쳐다보면 딱이다. 마치 비가 내 뜨거운 목구멍을 식혀줄 것처럼 시원하다.

굳이 껍질을 까지 않고 먹지만 그런 날은 일부러 껍질을 한 올 한 올 깐다. 너무 뜨겁지 않게 천천히, 여차하면 입천장이 홀랑 까지는 수가 있다. 하지만 너무 식혀도 안 된다. 목구멍을 지졌다고 느낄 정도는 되어야 한다. 젓가락에 감자를 꽂아 살이 닿지 않게 손톱을 세워서 껍질을 까야 할 것이다.

감자껍질을 살살 까서 목을 지지는 시간은 낮이어야 한다. 쏟아지는 빗줄기를 눈으로 바라보면서 감자를 꿀떡 삼켜야 한다. 당연히 감자를 먹는 장소는 창가여야 한다. 그래야 빗소리와 빗줄기를 동시에 즐기고 감자의 뜨거운 김을 극적으로 볼 수 있으니까.


종일 비가 오는 날 저녁에는 감자전이다. 믹서기에 돌리는 무식한 짓은 곤란하다. 식구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씩 강판에 갈아야 한다. 강판에 갈았을 때만이 식감이 적당한, 감자 알갱이가 남아있는 감자전을 맛볼 수 있다. 감자를 한꺼번에 다 갈아서 감자전을 부치는 게 아니라 감자 한 개를 갈아서 바로 감자전을 부치고 또 한 개를 갈아서 부치는 거다. 많아야 감자 두 개까지 허용한다. 감자를 한꺼번에 갈면 물이 생기는데 물을 따라 버리거나 밀가루를 넣어 걸쭉하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아주 곤란하다.

당근이나 양파, 깻잎, 고추 등을 넣어서 색을 화려하게 하는 것도 금지다. 감자전은 오로지 감자로만 한다. 소금도 가급적 넣지 않는 것을 권한다. 대신 식초를 듬뿍 넣은 간장을 준비한다. 취향은 여기서만 발휘할 것. 약간의 양파와 고추를 넣으면 더 맛나다.

한두 개의 감자를 갈아서, 약간 물이 나왔더라도 무시하고 잘 섞어, 얇게 부친다. 최대한 얇게 부쳐야 바삭하고 쫀득한 감자전을 맛볼 수 있다. 두꺼우면 씹히는 맛은 있을지 몰라도 쫀득한 맛은 덜하다. 먹을 때마다 감자 맞아? 왜 이렇게 쫀득해? 를 남발하며 먹는다. 다른 대화가 낄 틈이 없다. 오로지 감자의 쫀득함을 말하다 끝난다. 최대한 바삭한 부분을 떼어내 간장에 슬쩍 찍고, 간장에 담긴 양파와 고추를 하나씩 얹는다. 감자의 심심한 맛과 간장의 짭조름함을 동시에 맛본다. 양파와 고추가 개운한 뒷맛을 책임져준다.

하나 갈아 하나 부쳐서 먹고, 또 하나 갈아 부쳐 먹다 보면 끝이 없을 것 같지만, 강판을 가는 사람이 지쳐서 그만두게 된다. 먹은 것 같지 않다는 푸념도 나오지만 이미 먹은 감자가 한 푸대다.


오랜만에 온 식구가 다 같이 음식을 만들게 되는 즐거움은 덤이다. 반드시 역할 분담을 할 것. 다른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밍그적거리는 식구들이지만 감자전을 한다고 하면 너도나도 끼어든다. 부치는 즉시 다 먹어 치운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혼자 해 먹는 이들이라면 감자를 강판에 가는 야성미와 얇게 감자전을 부치는 섬세한 자신을 동시에 만날 수 있으니, 내 안의 두 자아를 만나보는 시간으로 안성맞춤이다. 감자전은 역시 혼자 해 먹는 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나눠먹기에는 너무 양이 적고 무엇보다 맛있으니까! 종일토록 하나 갈아 부쳐 먹고 비멍 때리고 또 하나 갈아 부쳐 먹고 비멍 때리는 혼전(혼자 감자전)의 경지에 이르면 그 어떤 혼밥도 두렵지 않다.



글쓰기 선생님이 감자를 소재로 던져준 적이 있다. 글은 의외의 것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어야 하니 평범한 곳에서 만나는 감자 말고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만나는 감자를 써보라고 했다. 누군가는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썩은 감자에 대해 썼고 누구는 감자 서리하던 친구 이야기를 썼다. 나는 감자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어쩌랴, 내게 감자란 감자전인 것을. 감자전을 의외의 곳에서 만나는 글이라면 모를까. 결국 평범하디 평범한 글밖에 못 썼지만, 감자에 대해 쓰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몇 날 며칠 감자를 먹었다. 고뇌는 힘들었지만 감자는 맛있었다.


어느 해부턴가 비가 왔다, 고 하기에는 미친 듯한 폭우가 세상을 다 휩쓸 듯이 덮친다. 원래 장마 오기 전에 감자를 수확하는 거니까 비가 오는 건 당연하지만 이제 장마가 아니라 재해수준의 우기다. 쨍하게 날이 좋다가도 갑자기 스콜처럼 폭우가 쏟아진다. 내가 사는 지역에도 집을 잃고 생명을 잃은 사람들이 많다... 제발 폭우 말고 비가 오면 좋겠다. 비를 낭만으로 말하는 것이 미안하지 않게.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우리는 먹는다. 먹어야 한다. 그러니 먹을 때는 잘, 제대로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