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씨 뿌리면 바로 싹이 나고, 여린 싹을 솎아 샐러드 해 먹고, 조금 더 큰 싹들은 손으로 툭툭 잘라 고추장 넣어 비벼 먹고, 한 달 좀 넘으면 한꺼번에 후루룩 뽑아 열무김치 담가 먹는, 어느 때나 좋은, 뭘 해도 좋은 열무 같은 사람 말이다.
먹을 것이 귀했던 옛날에는 특히 열무가 고마운 작물이었을 것이다. 다른 작물에 비해 손이 덜 가면서 밥상에 꼭 필요한 김치를 담글 수 있으니까. 열무에 비해 배추는 아침마다 배추벌레를 손으로 일일이 잡아줘야 하고 속이 차도록 끈으로 묶어줘야 하기에, 나 같은 얼치기 농부는 그냥 프로 농부님들을 믿고 사 먹는 것을 택한다. 열무도 벌레가 있지만 배추벌레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으니까 대충 휘뚜루마뚜루 해 먹는다.
처음 농사를 지을 때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열무 같은 작물만 심었다. 시간을 두고 정성껏 키워야 하는 작물, 고추나 양파, 마늘 등은 가급적 피했다. 성질 급한 내게 정성을 들여야 하는 작물은 토마토만으로 충분했다.
이렇게 기특한 작물이 있다니, 이토록 쉽게 수확을 허락하다니, 신기해하며 열무 씨를 마구 뿌려댔다. 하지만 주부로서도 게으르다는 걸 깜빡 잊었다. 우리 집 열무는 눈 깜짝할 사이 자라 하필 피곤한 날 부엌 바닥에 널브러져 있곤 한다.
얼마 전에 남편이 열무를 또! 뽑아왔다. 며칠 전에 이미 열무김치를 담갔는데 그새 또 자란 거냐고, 덜 반가운 티를 있는 대로 냈다. 남편은 그럴 줄 알고 이번에는 열무 씨를 안 뿌렸다고 했다. 그래, 잘했어. 땅도 좀 쉬어야지,라고 말했지만 내가 좀 쉬고 싶다.
이번에는 열무물김치를 담그려고 다듬다 보니 후각 때문에(코로나 때문에 후각에 문제가 있다) 간을 볼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마침 남편이 밤마실을 가버려서 간을 봐줄 사람이 없다. 한참 열무를 쳐다보다 그냥 다 삶아버렸다. 대충 김치를 담그고 내일 간을 보라고 해도 괜찮지만, 삶아놓은 열무를 냉동실에 쟁여놓는 것도 열무김치만큼 든든하다. 반찬 없을 때 열무 밥을 해 먹어도 되고 고추장에 무쳐 먹어도 되고 된장국을 해 먹어도 되니까. 그렇게 넣어둔 비닐 뭉텅이가 네 개나 된다.
음, 이제 좀 처치 곤란이다. 오래 걸리지 않아 좋다고 기특해하던 마음은 어디로 가고, 가끔 필요할 때만 나타나면 좋겠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고 싶다. 뭘 해도 너무 애쓰지 않고 아무 때나 불쑥 나서지 않고 가끔 부를 때만 나타나는, 쉽지 않은 사람이고 싶다.
그럼에도 냉동실의 열무나 김치냉장고의 열무김치는 항상 대기 상태인 게 좋다. 열무 밥이나 열무 비빔밥은 언제 먹어도 맛있으니까. 열무 밥을 할 때는 고기를 조금 넣어서 한다. 고기가 없으면 얼려놓은 베이컨을 넣는다. 고기보다 간이 잘 되어있고 기름기도 좌르르륵 흐른다. 신세계를 맛볼 수 있다.
열무 밥은 열무김치에 먹어야 제맛이다.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듯이, 열무 밥은 열무김치를 얹어 먹거나 열무김치의 국물을 떠먹어야 한다. 골고루 먹는 것이 건강에는 좋지만 이럴 때는 제 짝과 먹는 게 더 중요하다.
열무 밥에 열무김치처럼, 열무 보리 비빔밥에는 열무김치국수다. 밥이고 국수지만 반찬처럼 같이 먹으면 밥 한 숟갈만 더, 국수 한 젓갈만 더, 반복하게 된다. 어디서 끝내면 좋을지 몰라 결국 끝까지 그릇을 긁고 국물까지 마신다.
사실 열무김치를 맛있게 담그는 법을 아직도 익히지 못했다. 김치 중에 제일 쉽다는데 다른 김치는 그런대로 맛을 내면서 열무김치만은 잘 안 된다. 아니, 맛을 내는 건 결국 어떻게든 한다. 풋내만 안 나면 열무는 어쨌든 맛있으니까.
하지만 연한 열무 잎이 그대로 살아있는, 뽀얀 국물이 마치 육수처럼 진한, 그런 열무김치를 담가 보질 못했다. 너무 잎이 살아있거나 너무 숨이 죽었거나 너무 짜거나 너무 싱겁거나. 한 번에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하루 이틀 익혀가면서 소금을 보태거나 양파를 보태거나 효소를 넣거나 육수를 붓는 등 뭔가를 보태고 빼면서 겨우 맛을 익혀간다. 남편에게는 딱 좋은 상태의 열무를 수확하지 못해서라고 변명하지만 어디까지나 변명인 것을 나도 알고 남편도 알고 열무도 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열무는 여린 싹이다. 딱 좋을 때 솎는 게 아니라 아예 수확을 해버린다. 마치 새싹 채소 먹듯이 샐러드를 한다. 마요네즈에 비벼 먹을 때는 사과를 조금 채 썰어 섞으면 적당히 단맛과 심심한 맛이 어울린다. 재료를 여러 개 넣는 것보다 두어 개의 재료로 각 재료의 맛을 충분히 느끼기를 좋아하는데 딱 그렇다. 그냥 퍼먹어도 맛있고 밥반찬으로도 좋다. 물론 마요네즈 샐러드니까 샌드위치를 해 먹어도 좋다. 열무를 솎는 날이면 발길이 절로 빵집으로 간다. 한 개의 샌드위치를 위해 커다란 식빵을 사는 것이다.
효소와 식초를 섞어 드레싱으로 뿌릴 때는 찐 계란을 얇게 썰어 같이 먹는다. 다이어트를 하는 남편에게 가벼운 한 끼로 해주는데 결국 애피타이저로 먹는다. 열무는 지나치게 입맛을 돋우는 단점이 있다. 그래도 칼로리가 낮으니까 괜찮다고 우기는 남편.
열무는 참 곤란하다, 너무 맛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