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상추쌈

by 천둥


나는 상추쌈이 좋다. 상추의 물기를 툭툭 털어 두 장 겹치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갓 한 밥을 올린다. 된장에 고추장을 적당한 비율로 넣고 갖은양념을 버무려 만든 고소한 쌈장을 듬뿍 얹는다. 최대한 크게 입을 벌리고 한입에 밀어 넣으면, 그게 바로 시원한 여름의 맛이다. 여기에 고추를 고추장에 푹 찍어 한입 베어 물면 더할 나위 없는 맛의 극치다.(사실 이 맛은 50살이 넘어서 알게 되었다). 우적우적 소리가 나게 씹으면 절로 고개가 끄덕끄덕, 음, 음, 아무도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마구 답한다. 아직 씹으면서도 손은 이미 다음 쌈을 싸고 있다.

마법의 상추쌈.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지만, 상추쌈에는 상추가 있다.

“고기는?”

아이들은 식탁에 상추가 있으면 꼭 고기를 찾는다. 와, 난 그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남편 탓이다. 남편은 하다못해 참치라도 있어야 한다.

“쌈이잖아. 뭔가를 싸야지.”

“밥을 싸잖아. 상추쌈이니까.”

붕어빵에는 앙금이 있어야 하듯이 상추쌈에는 고기가 들어가야 한다는 인간들. 기회가 된다면 설문조사를 해보고 싶다.


여러분은 상추쌈을 어떻게 드십니까?

1. 상추에 밥, 쌈장

2. 상추에 밥, 고기, 쌈장

3. 상추에 고기, 쌈장(아, 고추와 마늘도 있어야 한다굽쇼? 눼눼~)

1번들이여, 나를 따르라.


어릴 때부터 고기 없이 상추쌈을 먹었다. 고기는 생일날 먹는 거고, 상추는 여름 내내 먹는 거니까. 입맛이 그렇게 길들여져서 그런지 몰라도 상추는 상추의 맛으로 먹는 게 좋다.


“얘들아, 상추 먹어.”

식탁에 앉기도 전에 이 말을 해야 한다면 장마가 코앞에 온 거다. 빨리 더 많이 먹어둬야 한다. 뜨거운 6월 햇살에 상추가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서둘러 따온 상추로 냉장고에는 상추 봉지가 넘쳐난다. 지난 토요일에 따온 거, 이틀 전에 따온 거, 어제 씻어놓은 거 등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내일모레면 또 이만큼을 따올 테니 더 빨리, 더 많이 먹기 위해 발버둥 친다. 왜 끼니는 세 번뿐인가, 한탄하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상추를 가져갔더니 나도 텃밭 해, 하면서 몹시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래, 이해한다. 그 원망스러운 마음.

상추가 나오는 계절에는 집집마다 상추가 얼마나 있는지 표시가 되는 어플이 있으면 좋겠다. 막대그래프처럼 표시되는 거다. 막대가 줄어들면 그 집 문고리에 상추 봉지가 걸리겠지. 먼저 거는 사람이 임자.

아, 이런 어플이 생기면 박완서 선생님이 뭐라 하시겠다. 박완서 선생님은 농부님들을 위해 당신 마당의 텃밭을 갈아엎고 꽃을 심으셨다. 처음에는 텃밭 농사짓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시다가 나 같은 사람이라도 농작물을 사 먹어야 한다고, 그까짓 거 아끼겠다고 진짜 땅을 지키는 농부님들 힘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음, 어쩌나...


결혼 초에 옥탑방에 산 적이 있다. 비가 오면 양철지붕에서 통통통 소리가 들렸는데 여름날 그 소리가 참 좋았다.

빗줄기가 요란하게 두들기면 누가누가 이기나 내기라도 하듯이 노래를 불렀다. 빗소리에 내 노래가 묻히지 않게 목청이 터져라 소리 질러댔다. 노래인지 웃음인지 모르는 소리들이 커져갔다. 아래층 사람들이 신경 쓰였지만, 빗소리가 커서 다른 사람은 안 들릴 거라고 되뇌었다. 사실은 우리 지붕 아래 내 귀에만 빗소리가 컸을 텐데.

열쇠를 잃어 버렸던가 아무튼 집에 들어가지 못한 적이 있다.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통통통 소리를 들으며 옥상 텃밭을 쳐다보았다. 2층 주인 할아버지가 옥상에 화분을 여러 개 놓고 고추며 가지며 작물을 키우셨는데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던 그 초록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비가 너무 오는데 괜찮을까 걱정도 되었고 지금 따서 먹으면 딱 맛있겠다 군침도 삼켰던 것 같다. 그날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와, 저 토마토 탱탱하기도 하다. 저 푸릇한 상추는 얼마나 맛있을까? 나도 저런 애들을 키워볼까? 그런 상념이 나도 모르게 상추로 손이 가게 했다. 티 나지 않게 아래쪽 부분까지 손을 깊이 넣어서 툭, 하고 꺾었다. 꺾을 때의 손맛이 짜릿... 한 것을 느끼는 동시에 남의 것에 손을 댔다는 자각이 들었다. 놀라서 주변을 살펴보다 다시 화분 위에 올려놓다 우왕좌왕했다. 지금 생각하면 비가 너무 와서 상추가 다 무를 수 있으니 적당히 따도 괜찮았을 것이다. 결국 그걸 먹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놀란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한편으로 여름에는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먹을 수 있지, 참 좋다, 생각했었다.


상추쌈을 먹으면 그날이 떠오른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먹던 상추쌈인데도 그렇다. 푸릇푸릇한 땅 위의 상추를 처음으로 탐스럽게 여기게 된 날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엄마, 언제까지 상추쌈만 먹어?”

아이들의 원성에 나는 주부로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인터넷을 뒤졌다.

“상추 김밥은 어때?”

온 식구가 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상추 밥 해 먹을까? 상추를 넣고 밥을 해서 간장에 비벼 먹는 방법이 있대.”

“아니야, 그냥 상추쌈 먹자.”

“그럼그럼, 상추쌈이 얼마나 맛있게요~”

온 가족의 의견 일치로 오늘도 우리는 상추쌈이다! 이렇게 지겹게 먹는데도 때마다 여름의 상추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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