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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Nov 15. 2019

할머니의 낱말


오늘은 할머니 집에 가는 날이에요.

우리 할머니는 일흔두 살이에요.


“아이고 우리 손주 왔냐. 가만있자,  이름이 왜 생각이 안 나니?”

할머니는 자꾸만 내 이름을 잊어먹어요.

“할머니, 저 담이잖아요. 담이.”

“그래, 담이, 우리 담이 왔으니, 그거 줘야지.”

“할머니, 뭔데요?”

“그거 있잖냐, 그거. 아이고. 그래, 맞다. 식혜. 식혜 줄까? 참, 어미야, 그것도 꺼내라. 애들 좋아하는 거. 뭐지? 그래 그 오이소박이.”


할머니는 가족들을 위해 나박김치를 담그고 식혜를 만들고 온갖 나물을 무쳐놓았어요. 일을 하실 때 할머니는 하나도 잊어버리는 것 없이 척척 해내요. 또, 할머니는 노래를 아주 좋아해서 한번 들으면 다 기억해요.

하지만 말할 때 할머니는 자꾸 낱말을 잊어요.

가족들이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괜찮다. 괜찮아. 지금부터 적어놓지 뭐.” 하셨어요.  


할머니는 잊어버린 낱말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어요.

낱말을 적어놓은 종이를 잃어버리고 온 방안을 뒤지던 할머니는 종이를 벽에 붙여놓았어요. 침대 옆에, 화장대 옆에, 냉장고 옆에, 화장실에, 소파 옆에.

이제 할머니네 집에는 온 집안에 낱말 종이가 붙어있어요. 할머니는 낱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벽에 붙은 종이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찾아다녔어요.

“여기 있다. ‘추기억하는 거. 그래. 이 말이 왜 생각이 안 나서...”

할머니의 종이에는 자꾸만 낱말이 늘어나고 낱말이 늘어나는 만큼 할머니는 낱말을 잊어갔어요. 이제는 잊어버린 낱말을 찾다가, 무슨 낱말을 찾으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렸어요.


어느날, 아빠가 전화를 받고 급하게 뛰어나갔어요. 엄마랑 뒤늦게 찾아간 그곳에서 본 할머니는 아기처럼 아빠에게 안겨있었어요.  


할머니는 더이상 종이를 붙이지도 찾아보지도 않아요. 여전히 낱말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애써 기억해내려고 노력하지 않아요.

나를 보아도 가만히 쳐다볼 뿐 이름을 부르지도, 음식을 권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이제 할머니의 집은 원래 그대로 깨끗한 빈 벽이에요. 할머니 침대 머리맡에 단 한 장만 빼놓고.

거기에는 할머니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세 글자가 적혀 있어요.

김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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