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한 응원
"질투는 나지만 그래도 응원해줄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다고 믿어. 그런 내가 좋아."
지금까지의 드라마와는 달리 <청춘 기록>이라는 드라마에서는 먼저 꿈을 이룬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질투로 상대를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사람과 응원해주고 자신도 잘할 것을 믿는 사람. 말로는 응원한다고 하지만 질투하는 마음이 너무 빤히 보여 조금도 응원으로 와 닿지 않는 사람과 부럽다고 말하는데도 응원이라는 걸 알고도 남는 사람이 있다.
그녀는 온전히 응원 쪽에 서있는 친구다.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응원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신기할 정도로 상대를 자신과 비교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탓하거나 누군가를 비하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꼬인 사람들이나 감정을 낭비한다는 걸 그녀를 보며 믿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녀를 질투해서 첫 아이를 가졌다. 임신한 사람을 질투하면 임신이 된다는 속설이 있는데 바로 내가 그런 경우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심하게 질투가 났다. 아이를 기다리던 때였으니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바로 얼마 전 다른 친구의 임신소식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반면 그녀에게는 불같은 질투심이 생겼다. 그녀의 아들과 내 아들은 두 달 차이 동갑내기다.
우리는 지방 선거가 막 시작될 무렵 한 후보의 선거지원단으로 만났다. 덕분에 사회를 인식하는 세계관이 비슷하고 정치 성향도 비슷해서 거리낌 없이 서로를 드러낼 수 있었다. 선거가 끝난 후에 아예 그녀가 사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우리는 임신부터 출산, 육아를 함께 했다. 같은 산부인과에 다니고 같은 그림책을 사서 보고 같은 신생아용품을 쇼핑했다. 두 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신생아 때는 두 달도 큰 차이가 있고 더구나 그녀의 아들은 발육이 워낙 좋아서 많은 것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아이가 세 살 무렵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한 달에 한 번씩 그녀가 사는 곳으로 달려갔다. 명분은 그림책 보는 엄마 모임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친구가 내 친구가 되고 그녀의 친구 아들이 내 아들의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아이 키우는 모든 관점을 공유했고 서로의 교육관을 탄탄하게 지지해주었다.
어느 날 그녀가 이혼을 했다. 이혼녀로서의 고통을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을 때 욕받이가 되어주면서 더욱 살뜰해졌다. 그녀가 사회생활로 바빠졌고, 급속도로 다른 세상으로 편입했지만, 그럼에도 서로의 삶이 어떠할지 잘 알았다. 사는 곳도 멀었고 생활도 멀었지만 그냥 이해되었다. 세월이 흘러 갱년기로 몸이 무너지고 번아웃으로 마음이 무너질 때도 그녀의 불안을 다독여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나야. 재워줘."
싱크홀처럼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고 느끼던 어느 날 나는 그녀를 찾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주소를 불러줬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나지 못한지 25년이 흘렀다. 그저 통화와 톡으로 그 모든 시간을 채워왔다.
그녀는 내 삶의 본질을 알기에 내가 뜬금없는 무엇을 들고 나타나도 두 손 두 발 들고 지지하고 위로해줄 것을 알았다. 그녀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림도, 글도, 삶도. 뜬금없는 덕질까지도. 그녀만큼 나의 격렬한 덕질을 고스란히 이해해준 사람이 없다. 이제 시작한 작가라는 나의 꿈을 열렬히 응원하고, 매니저를 자청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우리는 처음으로 나란히 누워 밤을 보냈다. 처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힘들었던 밤마다 서로가 있었으니까. 하나도 안 변했네, 같은 흔한 인사말도 당연히 없었다. 우리는 어제 만난 듯이 이야기하다가 잤다. 불면증이 심한 그녀가 내 옆에서 코를 골며 잠들었다.
사실 우리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비슷한 듯하지만 서로 다르기 때문일 거다. 우리는 같은 문장, 다른 해석이라는 편지글을 써보자고 할 만큼 다르다. 취향도 다르고 생활방식도 다르고 감각도 다르다. 그녀는 하얀 시트의 호텔을 좋아하고 나는 절절 끓는 한옥을 좋아한다. 그녀는 서론본론결론을 미리 생각해서 글을 쓰고 나는 첫 문장만 떠오르면 그냥 쓴다. 그녀는 상식범위 내에 행동하고 나는 상식범위를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세상이 원하는 인재로서 충실하지만 혁신을 추구하고 나는 세상이 뭐라 하든 나만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처음에는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놀라워하고 신기해했지만,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인정하고 가끔 상대가 대단해보인다.
그런 그녀가 요즘 자꾸 아프다. 너무 성실하고 너무 반듯해서 그렇다. 세상은 그렇지 못한데 그녀만 올곧으니 버거울 수밖에 없다. 마구 흩뜨려놓고 싶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성실이 그녀를 낫게 해줄 것임을 믿는다. 누구보다 자신을 아끼고 돌볼 줄 아는 사람이니까. 그 와중에도 내게 ‘통증으로 철학하기’ 글을 쓰라고 권한다.
가끔 그녀가 내게 조언을 구한다. 그렇다고 내 말을 듣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제 남의 말을 듣지 않을 나이다. 듣지는 않으면서 그저 고통을 호소하며 내게 어리광을 부린다. 어딜 가나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는 이제 어리광을 부릴 데가 없다. 그런데 그녀가 내게 어리광을 부리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작은 쓸모가 뿌듯하다.
그녀는 자주 묻는다. 자신이 너무 징징대서 피곤하지 않느냐고. 아니, 오히려 행복한데? 내가 친절한 사람이 된 거 같아서. 보잘 것 없는 내 체력으로도 너를 도울 수 있어서. 어떤 그룹과 움직여도 제일 뒤처지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기다려주고 손을 내밀 수 있다는 건 꽤 큰 기쁨이야.
"이사 계획 없어? 가까이 좀 살자. 나이 들수록 가까이 사는 친구가 필요해."
"네가 내 옆으로 올 생각은 하지 않고 왜 나더러 오래?"
그 마음 잘 알면서 괜히 툭탁거려본다. 사실은 조금 찔려서 그런다. 나는 원래 품어주는 성격이 아닌데, 그녀와의 관계에서만큼은 내가 들어주고 기다려주고 공감해주는 사람이 되어있다. 내 본래 성격을 빨리 밝혀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괜한 걱정이겠지? 그렇지?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