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원형
내게는 특별하지만,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녀들 이야기들 가운데 아주아주 특별하고 대단한 우리들의 그녀들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하고 싶다.
정세랑, 그녀를 나의 그녀로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이 문장 때문이다.
"남자가 잠결에 실수로 여자를 때렸다. 4일째 되어서야 알았다. 두려운 것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최악의 상상들이 연이었다. "<웨딩드레스 44>
침대에 누워 딩굴딩굴 책을 읽다가 아악,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천장에서 커다란 손가락 두 개가 내려와 머리끄덩이를 잡아 일으킨 거 같았다.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다. 다시 눕지 못하고 멍하니 책을 내려다보다 책상 앞에 앉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랬구나, 이게 내 두려움의 원형이었구나. 왜 어릴 때부터 개를 무서워했는지, 개로 대표되는 모든 짐승과 짐승 같은 외관을 한 남자들이 불편했는지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다. 개는 아무 잘못이 없다. 위협적인 어떤 것이 개로 대변되었을 뿐이다. 나보다 키나 몸집이 큰 친구들 옆에 서면 이상하게 불편했다. 내가 키가 큰 편이라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을 피했을 테니까. 키는 컸지만 힘은 몸집에 비해 약했다. 결혼 후 유아차를 밀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토록 우아하게 유아차를 미는 건지 의아했다. 자전거 앞에 아이를 태우고 다니는 것이 일종의 로망이었는데, 아이를 태운 자전거는 내 힘으로 세우는 것조차 감당할 수 없었다.
한 손에 아이를 가뿐히 안고 움직이는 남자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삼시 세 끼> 프로그램에서 남자 셋이(특히 옥택연) 가마솥을 번쩍번쩍 드는 모습을 보면, 보는 것만으로 힐링이 되었다. 역시 밥은 남자가 해야 한다며 물개박수를 쳤다. 출연진이 남자들이었다가 여자로 바뀌었을 때 <삼시 세 끼> 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내가 하는 것도 아닌데 힘이 들었다. 옥택연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들도 같이 가마솥을 들어 옮기고 삼시 세 끼를 어렵지 않게 해 먹었건만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무거운 웍으로는 자유롭게 조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설거지를 하거나 주방 내에서 여기저기 옮기는 것도 손목에 무리가 오는데 어떻게 여자들에게 삼시 세 끼를 가마솥밥을 시키냐, 혼자 분노했다. 사실 여자들이 밥하는 게 예능으로 다가오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부실한 몸에 자꾸 감정이입이 되어서 못마땅했다.
본능적으로, 힘이 약하다는 사실만으로 위축되어 살았다. 장정이 있는 집이 딸만 있는 집보다 논에 물대기가 쉬웠다던 옛말을 가벼이 들어 넘기지 못했다.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라고 하지만 힘은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힘이 곧 권력은 아니지만 권력은 물리적인 힘을 바탕으로 삼는다. 게다가 딸 셋에 아들 하나인 집안의 막내딸로서 가부장과 여성 폄하를 몸으로 겪어왔다. 때로 고개를 끄덕이며 적당히 공감하는 척, 봐주는 척, 인정하는 척하지만, 그 폄하하는 시선만큼은 절대 멈추지 않는 세월을 살았고, 지금도 온몸에 들러붙어 새겨져 있다. 덕분에 여성주의를 일찍 깨치고 저항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적어도 내 일상에서만큼은 불필요한 차별이 들어서지 않게 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는 잠결에도 언제든지 덮칠 수 있었다.
작가 정세랑은 그 지점을 낚아채어 날카롭고도 유연하게 표현했다. 그동안 여성주의를 표방한 문학작품은 무수히 있어왔다(우리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공지영이 있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게, 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지성의 논리와 팩트로 시원하게 한방 날리는 소재와 표현, 주제들을 많이 만나봤다. 그때마다 두 팔 벌려 열렬히 환호했었다. 그런데 정세랑의 저 문장은 가만한 와중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전생이 있다면 나는 새였을 거라고, 그것도 아주 작은 뱁새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양이가 무서워 쪼르르 도망 다니는 내 꼴이 딱 그랬으니까. 황새 쫓아 가랑이가 찢어지는 게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원하는 바를 향해 돌진하는 성향을 가졌는데, 동물, 짐승 앞에서 바로 꼬리를 내리고 숨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작은 새라서 그렇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서까지 솜뭉치 앞에서도 목을 움츠리는 뱁새인 내가 한심했다. 그런데 정세랑은 정확한 언어로 정곡을 찌름으로써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니 서글프지만, 인류 전체로 봐서는 안 된 일이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내게 큰 위안이다. 원초적 문제를 외면하고 나의 부족함에 매몰되었던 나를 용서하고 작고 가녀린 손목을 있는 그대로 가련히 여겨도 된다는 의미다. 조금씩, 미워하고 싫어했던 굵은 뼈대의 남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기를 쓰고 애를 쓰고 어떻게든 내 몸을 부풀리며 위협에 맞서지 않아도 괜찮다고 다독이게 했다. 진실은 다만 아는 것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받아들이는 힘은, 평안을 준다.
좋은 지적이라고는 해도 내가 느끼는 것처럼 날카롭다고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다. 모든 여자들이 나와 같은 두려움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두려움의 원형도 여성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겠구나, 깨달아졌다. 그만큼 다양하게 변이 되어 억압해왔을 테니까. 그들은 또 아마 정세랑의 다른 글 속에서 자신들의 그것을 찾아내고 나처럼 놀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세랑을 다만 여성의 타고난 두려움, 타고난 분노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에는 많이 아쉽다. 하지만 정세랑이 가진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을 담은 문학적 발현이나 경계 없이 자유로운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여기서 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여기, '나의 그녀'에서는 내 안에 숨어있는 작은 정세랑을 발견하게 해 준 것, 타고난 나, 뱁새로 돌아가 내 안에 숨어있는 타고난 두려움, 타고난 분노감을 알게 해 준 작은 정세랑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 안의 정세랑에게 느긋하게 휘파람을 불어주는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