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창작 쫌 할까?!
충전기 같은 모임이 있다. 창작하는 그녀들과의 모임이다. 17년도부터 시작했으니 햇수로는 벌써 6년째지만 중간에 쉬었다 다시 만났으니 4-5년쯤 된 거 같다. 창작을 위해 모였으나 특별히 작품이 나온 것은 없다. 각자의 창작정신에 서로 반하는 게 전부다.
>김작가
김 작가가 또 우울해졌다. 가까운 이가 김 작가더러 우울해서 싫다고 했단다.
“내가 우울하기도 하지만 항상 우울한 건 아니잖아, 나는 우울하기도 하지만 유쾌하기도 하잖아. 나는 사람들에게 뭔가 해주는 걸 좋아하기도 하잖아. 근데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서로 그 정도는 감당해줘야 하는 거 아니니?”
그렇게 자신을 잘도 알면서 그녀를 잘 모르거나 더 이상 알고자 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듣고 우울해하다니. 바보, 김 작가...
사실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우울하다. 그러니 그녀의 우울을 탓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녀는 자주 우울하다. 아니, 그녀는 우울로 만들어졌다. 어쩌면 그게 그녀의 정체성이다. 정세랑의 말대로 우울은 그녀의 지성을 낳고 예술적 감각을 낳고 위트를 낳는다. 무엇보다 밤마다 넘실넘실 타고 올라오는 우울과 싸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아침이면 가족을 부양하는 생존 욕구로 또다시 일어나는 사람이다. 그녀가 업싸이클링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 버린 것들에 미련을 덕지덕지 쌓는다. 동시에 전사처럼 가차 없이 부숴버린다. 근육과 관절을 바쳐서 뚝딱뚝딱 갈고 덧씌워서 새로운 것, 세상에 없던 것, 처음 보는 것을 탄생시킨다.
그녀의 예술가적 기질은 감자나 비누곽 같은 걸로 시를 쓰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그녀가 말은 있는 그대로 노래가 되고 시가 된다. 주변에 있는 아무나 붙잡고 함께 그림을 그리는데, 사람이다 사람이다, 되뇌면 사람이 되는 거야, 라고 말도 안 되는 설명을 한다. 그게 또 신비한 기적을 낳아 똥손을 금손으로 만들어버린다. 하루에도 열두 개씩 명언을 남기는 그녀다.
그래서 김 작가는 김 작가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녀의 삶 자체가 작품 활동이니까.
그런 그녀이기에 때론 지치고 소진될지라도 감당해줘야 할 것들을 기꺼이 감당하며 모임을 함께 한다. 감당 못하는 것들은 저리 물렀거라.
>구름
그런 구름 본 적이 있니? 솜사탕 기계에 설탕을 넣고 딱 세 바퀴만 돌렸을 때 성기게 엉긴 솜사탕, 바로 그런 구름. 송송송, 구름이 솜사탕보다 성기게, 깃털보다 가볍게, 봄바람이 실체가 있다면 바로 그것일 것 같은 모습으로 떠있는 거. 비행기가 구름과 같은 시선의 높이로 날아갈 때, 세상에 구름이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오는 그런 구름.
우리 구름이는 그렇다. 구름이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싶게 가볍고 부드럽고 소중한 웃음을 웃는다, 우리 곁에서.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화를 낸 이야기를 가끔 한다. 하지만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녀가 화를 낸다고? 한숨이 아니고? 난감할 때 떠오르는 특유의 표정으로 투덜거리겠지. 그런 것도 화라면 아이들은 더 난감하겠지. 그녀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데,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사실은 그녀가 살아온 과정에 대해서나 지금 살아가는 삶의 모습, 그 어느 것도 가늠되지 않는다. 뭉게뭉게 떠있지만 가까이 가면 손에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나의 세포와는 전혀 다른 것들로 구성된 것 같은, 어디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부류의 사람이다. 그녀가 가져오는 책, 그림, 음악은 언제나 내 목록에 한 번도 올라보지 못한 것들이다. 그런데도 편견이 많고 낯을 가리는 내가 구름이를 향해 선뜻 다가설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나를 구름처럼 감싸 안아 버리기 때문이다.
구름이 요즘 힘들어한다. 어둡고 외로운 것들이 구름에 끼어들었나 보다. 어느 날 참을 수 없이 무거워지면 한바탕 비를 쏟아낼 것이다. 그러면 구름은 다시 바람 따라 하늘을 떠다닐 것이다.
>하이디
하이디가 왜 하이디인지 이번에야 알았다. 하이디는 그동안 바쁜 와중에 모임에 잠시 들렀기 때문에 항상 조금 지쳐있었고 한발 물러나 있었다. 코로나를 맞아(?) 한동안 쉬는 시간을 가졌다는 하이디를 만나면서 하이디가 얼마나 하이디스러운지 알게 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요들송을 부르도록 높았다. 대화는 흥미 높은 스위스 사람들처럼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어떤 생각을 떠올릴 때 문자보다 이미지로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이디가 대표적으로 그런 쪽인데, 하이디의 드로잉과 글을 보면 그녀의 뇌는 연필로 스케치되어 있을 것만 같다. 연필이지만 선명하게, 그러면서도 언제든지 다시 지우고 쓸 수 있게.
하이디는 음악을 한다. 언젠가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말에 음알못이면서 음악에 맹목적인 존경심을 가진 나는 반해버렸다. 특히 우쿨렐레 연주를 하는데, 그녀의 손가락에는 음표가 없다. 우쿨렐레는 그저 그녀의 덧니와 같이 웃음으로 연주되는 듯하다.
그녀로부터 우쿨렐레를 배운 적이 있다. 문자 중심의 나는 그녀의 우쿨렐레 소리를 음표로 바꿔내지 못하고, 음표로 바꾼 소리는 그녀의 것과 너무 달라서 결국 포기했다. 그녀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웃음소리 같은 연주를 하고 싶다는 내 과욕이 문제다. 내게 악기는 계산기와 같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빼고 무엇을 곱해야 하는지, 그 버튼을 눌러야 결과치가 나온다. 하지만 그녀의 연주는 버튼이 없다. 그저 몸과 악기가 하나가 되니까. 악기는 리듬을 타기 위한 거니까. 하이디가 빨리 수강생이던 나를 잊었으면 좋겠다. 모임 동료로서만 기억되고 싶다.
>나무
나무와 매주 시 쓰기를 한 적이 있다. 그녀의 시는 항상 한 편의 동화였다. 그녀의 상상력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다. 하지만 그녀는 탈고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시를 탐냈다. 내가 조금만 다듬어주면 안 될까? 묻고 가끔 그녀의 허락으로 다듬다 보면 그녀의 시가 아니게 되었다. 생긴 그대로 두어야 그녀의 시답다.
또한 그녀는 생각지 못한 순간에 여기저기로 자유롭게 튄다. 위트 있는 말 한두 마디로 우리를 순식간에 이리저리로 끌고 가 버려서 모임을 시작하려면 그녀의 입을 막아야 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책 이야기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진지하다. 목소리가 낮아지고, 꾹꾹 눌러서 말한다.
그녀는 엉덩이만 붙이면 글이 나온다, 고 말해서 우리를 놀라게 한 적이 있는데(물론 우리도 엉덩이를 붙이고 컴퓨터를 째려보는 거부터 한다. 그렇다고 글이 나오는 건 아니다. 그저 필수조건일 뿐), 그동안 읽은 책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책에는 그녀다운 힘찬 글씨가 가득한데 읽는 중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그곳에 풀어놓는다. 그녀는 읽은 책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하는데, 그녀의 메모가 담긴 책이 언젠가 귀한 소장품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그녀의 글만큼 그녀의 그림을 아끼는데, 그녀의 그림은 새파랗게 밀어낸 어린 승녀의 머리통 같다. 파르라니 푸르다. 초록 그늘을 품은 나무처럼 짙다. 그녀의 그림은 글보다 더 그녀를 드러내 준다. 항상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서 어떻게 저렇게 진하고 곧은 선이 나올 수 있을까 볼 때마다 놀랍다.
그 누구보다 그녀가 꼭 드로잉 에세이를 써주기를 학수고대한다. 제발!
>키키
그녀에게 ‘나의 그녀’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을까. 비록 그녀 시리즈가 나에게 의미 있는 이들에 대한 헌정 글이기는 해도 키키에게는 나의 라는 소유격을 쓰는 것부터 그녀 고유의 성질을 해치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그만큼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전히 창작욕에 불타고 있다. ‘여전히’라고 말하는 이유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항상 아쉽기 때문이다. 여전히 아쉬운 상태지만 안달하는 나와 달리 그녀는 지나치게 욕심내지 않는다. 부족함조차 너그러이 떠안고 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나는 그녀가 그림책을 내고 출판 기념회를 하는 걸 보고 나도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는 당찬 포부를 갖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굉장히 무기력하고 우울한 상태였는데 그림도 못 그리면서도 그림책 작가가 되겠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어난 것이다. 그날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녀는 나를 작가라는 길로 인도해준 사람이다.
그녀는 상대의 장점을 끊임없이 칭찬하고 극대화해서 자신감이 생기게 하는 데 엄청난 재주가 있다. 누구라도 자신감이 없다면, 그녀 앞에 서보라. 그녀가 당신의 장점을 찾아내줄 것이고 진심에서 우러난 응원과 지지를 해줄 것이며 새롭게 살아갈 에너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기를 걸어도 좋다. 진짜 그렇다는 쪽에 내 파버 카스텔 연필을 건다.
어리고 약한 것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많은 제안과 실천을 해나가지만 그녀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가기를 원한다. 항상 긍정적인 웃음으로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만 절대 남들 말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녀와 크고 작은 일을 도모해보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웃으며 둥둥 떠다닌다. 공기처럼.
그래, 그녀가 공기라면 좋겠다. 그녀가 공기로 떠다니며 무한 긍정 에너지를 발산해준다면 굳이 내 곁에 앉히려고 애쓸 필요 없겠지.
>그리고 신입 권 작가가 있다. 신입이라기에는 벌써 2년째지만 그녀는 아직 가만히 우리 얘기를 듣는다. 우리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가 힐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우리의 효용성이 뿌듯하다. 언젠가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힐링하게 될 것을 안다.
그녀는 전통문화를 외국에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요즘처럼 k문화가 주목을 받기 전부터 그녀는 그 일을 해온 거다. 그러니까 그녀는 k문화의 선도주자다. 우리처럼 창작에 대한 마음만 가득한 상태가 아니라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선도적인 일을 수년째 해왔다는 사실이 나는 자랑스럽다. 권작가는 디자인과 비즈니스라는 측면을 떠나 순수한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한다. 그녀가 만든 문양이 그림책으로 만들어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또 한 명, 푸딩이 있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능력 있는 그다. 우리 모임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패스.
우리는 창작자들이다. 항상 무언가를 쓰고 그리고 만들고 노래한다. 그림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모여서 3년간 모임을 유지했다. 그리고 몇 년을 쉬었다 다시 만났다. 책과 그림과 영화 등을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기로 했지만 그건 그저 핑계다. 이런 멤버가 다시없음을 알기에 서로를 놓지 못하는 거다. 서로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만난다.
샘이 많은 김 작가는 언제나 다른 이들을 부러워한다. 모든 이야기를 부러워, 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나도 부럽지만 표시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뿐인데 김작가는 감추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김작가 외에 다른 사람들은 부러움이나 질투, 시샘이 없다. 아낌없이 격려하고 상대의 성장과 발전을 진심으로 축하해준다. 지나치게 각이 없어서 문제라고 할 정도다. 스스로 꽤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다가 이들 앞에 서면 절로 작아진다.
성마르게 덤벼드는 나와 달리 그들은 항상 여유롭다. 본업도 있고 주부 노릇도 한참 손이 많이 갈 때인데 언제나 푸근한 웃음을 잃지 않는다. 주어지는 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도 어느 순간 보면 저만치 앞서 나가 나를 돌아본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을 이토록 자유롭게 하는 걸까.
동시에 이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니까 여기 속하는 거겠지, 안심이 된다. 그러니 이 모임이 앞으로도 쭈욱 이어지기를.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괜찮다(우리는 딱 한번, <쫌>이라는 문집을 만든 적이 있다). 나에게 쫌이 있지, 라는 생각만으로 돌아갈 고향이 있는 탕아처럼 든든하다. 친정 있는 여인네처럼 미더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