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그녀,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을 쟁취하라

by 천둥

‘<자기만의 방>은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항변할 뿐 아니라 공적 공간에의 진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글귀(<걷기의 인문학>)를 보았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던 이유의 조각 하나가 떼구루루 굴러들어 오는 것 같았다. 지금도 사적 공간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한 뼈아픈 현실을 살기에.


스무 살 무렵, ‘여성문제연구소’라는 이름의 동아리에서 낮과 밤을 보냈다. 선배들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함께 <자기만의 방>을 필독서로 읽게 했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세계여성사>같은 이론서만 읽던 때라 울프의 문학적 표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눈과 마음이 <사랑의 기술>에 가있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필독서는 막연한 숙제만을 남겨주고 잊혔다. 게다가 당시에는 자기만의 방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들이미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작가로 살게 되면서 다시 읽은 <자기만의 방>, 그리고 <올란도>는 우선 배 아프도록 탐나는 천재성이 무릎을 꿇게 만든다. 빨아들이듯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적 문체를 감탄하다보면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이야기 구성에 놀라고 깊은 지성과 넓은 사고에 탄성을 금치 못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의 지성은 한줄기 빛으로 우리 마음 속을 파고든다. 부러움으로 헐떡이다가 존경으로 우러르다가 나를 물어뜯다가,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실은 그녀의 글을 읽어내는 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부러울 자격도 없다.

부럽다는 작가로서의 감정을 겨우 걷어내자 그녀라는 개인이 보인다. 백 년이 넘도록 되풀이되며 변주되고,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도 울고 있는, 하나의 시대정신을 만들어낸 자의 개인적 고통이다. 어둠 속의 정수를 찾아 바닥끝까지 내려가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정신세계를 부러워한 적이 있다. 어릴 때는 그런 것이 멋있었다. 위대함을 위해서라면 광기 속에서 살아가도 좋다며 열망했었다. 지금은 아니다. 위대하지 못하더라도 보통의 삶을 살고 싶다. 누군가가 미쳐서 건져내 온 정신적 유산을 떡고물처럼 받아먹는 걸로 족하고 싶다. 그녀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지성적이고 정신적인 교류가 필요했을 것이다. 길지 않은 삶을 버티게 해준 비타 색빌 웨스트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올란도>를 읽는다. 비타 색빌 웨스트가 아니었다면 <올란도>가 가능했을까? 물론 올란도라는 인물에는 울프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었겠지만, 자신을 제외한 누군가를 상상한다면 비타 색빌 웨스트였을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헌신적으로 울프를 지원했다고 하지만 정신적인 대화상대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것이다. 더구나 남자로서의 한계가 있었을 테니.


울프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여성들이 남편과의 대화에 어려움을 겪는다. 나도 남편과 결혼하고 몹시 외로웠다. 결혼 전에도 대화가 삐그덕거린다는 걸 느꼈지만, 결혼하면 나아질 거라고 근거 없는 착각을 했다. 결혼 후 정신적으로 너무 외로웠고, 책과 음악과 예술을 끊어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고 갈증이 덜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혼자 겪어내야 할 고독이라는 게 있고, 책과 음악과 예술이 그것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다.

나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많은 여자들이 외로움을 호소한다.

남편이랑 무슨 대화를 해, 대화는 여자들끼리 하는 거야.

수많은 옆집 아줌마들과 했던 우리의 주문이었다. 실제로 수많은 옆집 아줌마 덕에 지금의 감수성과 지성을 지켜내며 살았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종 여성을 좋아합니다. 나는 그들의 비관습성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예민함을 좋아하고 그들의 익명성을 좋아하지요." 정희진은 여성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고통이자 자원.” 이들의 연결성을 사랑한다.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단 하나의 재능-작은 것이지만 소유자에게는 소중한-이 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문장을 보면서 그녀의 비관습성, 예민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쓰기 시작하면서, 쓰지 않으면 영혼이 소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나 혼자만의 과도한 상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마치 그녀가 100년의 세월을 날아와 가만히 내 어깨를 안아주는 것 같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방만큼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돈인데, 기본소득의 중요성이 떠오른다. 자립을 위한 돈에 대해 생각할 때는 노동권이 우선 떠오르지만, 이 문장은 노동하지 않고 휴식과 사색을 누릴 권리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시대에는 기본소득과 연결 지을 수밖에 없다.

지금 나는 자기만의 방, 창작과 사색과 예술을 위한 공간과 시간을 누리고 있다. 50년을 생활인으로 살아온 내게 주어진 일종의 보상이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노년이 길어지고 있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현재는 그렇다. 그동안 가족들, 특히 남편과 서로의 삶에 대한 경계를 잘 구분 짓고 보장해주며 살아온 덕분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거나 요구하지 않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정신에 대해 과하게 궁금해 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존중감이 서로에게 있다. 나의 그녀들, 앞서 살아온 수많은 버니지아 울프들이 만들어준 고귀한 선물이다. 하지만 거기 머물러서는 안된다.

“1866년 이래 영국에는 여성을 위한 대학이 적어도 두 곳 존재해왔으며 1880년 이후에는 기혼 여성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도록 법적으로 허용하였고 1919년에 여성은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전문직이 여러분에게 개방된 지 대략 10년 정도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릴까요? 여러분이 이 막대한 특권들과 그것들을 누릴 수 있었던 기간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기회가 부족하고 훈련이나 격려를 받지 못했으며 여유와 돈이 없다는 변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녀의 호소를 뼈아프게 받아 안아야 한다. 그녀들 덕분에 누리게 된 수많은 권리와 자유를 생각하면, 더 이상 '자기만의 방'을 갖는 개인적 실천으로는 부족하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주어져야 하고 더 넓은 공적 공간과 정당한 노동권과 기본소득이 주어지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 “인생이란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니까.

그녀만 보면 나는 전사가 된다.




‘<자기만의 방>은 여성들에게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항변할 뿐 아니라 공적 공간에의 진입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는 글귀(걷기의 인문학)를 보았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던 이유의 조각 하나가 떼구루루 굴러들어 오는 것 같았다. 지금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한 시대를 살아가는 뼈아픈 현실과 함께.


나의 그녀,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큰 그녀, 우리 모든 여성들의, 아니 인류 전체의 정신적 유산으로서의 그녀인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꼭 한 번쯤 말하고 싶었다.

<자기만의 방>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함께 젊은이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필독서였다. ‘여성문제연구소’라는 이름의 동아리에서 스무 살 무렵에 읽었던 그것은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겪어온 수많은 걸림돌에 대해 명료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럼에도 필독서다운 숙제만을 남겨주고 잊혔다. 당시 내게는 자기만의 방보다 내 밥그릇의 문제가 너무나도 컸으므로.


작가가 되고 싶은 지금 다시 읽은 <자기만의 방>, 그리고 <올란도>는 배 아프도록 탐나는 천재성이 우선 눈에 띄어서 그들에 대한 존경과 부러움의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울프의 깊은 지성과 빨아들이듯 몰입하게 만드는 작가적 문체, 이야기 구성 등 모두가 그랬다. 특히 글을 쓴다는 것은 이처럼 리얼리티 넘치는 문장이어야 한다는 것. 실은 읽는 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부럽기보다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게다가 마냥 부럽다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나이를 먹어 현실적이다. 백 년이 넘도록 되풀이되며 변주되는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 울고 있는, 하나의 시대정신을 만들어낸 자의 개인적 고통이 눈에 뻔히 보여 아프고 에리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처럼 어떤 정신에 도달하기 위해 미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릴 때는 나도 그들처럼 미치고 싶었다. 정신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그 정수를 캐내고 싶었다. 시대를 앞선 위대함을 위해서라면 미친 듯한 광기 속에서 살아가도 좋다며 열망했었다. 지금은 아니다. 위대하지 못해도 보통의 삶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려서인지 굳이 미치고 싶지 않다. 미치도록 파고 들어가 건져내 온 정신적 유산을 떡고물처럼 받아먹는 걸로 족하다. 그녀에게 진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울프가 사랑했다던 비타 색빌 웨스트에게도 같은 의미에서 감사한다. 나는 그녀를 동성애니 양성애니 하는 잣대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지성인들 간의 정신적 교류가 그리웠을 것 같다. 울프의 남편이 아무리 헌신적이었다고 해도 남자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앞선 지성인이었던 색빌웨스트만이 울프의 미래지향적인 대화 상대가 되었을 거라고 짐작된다(순전히 짐작이지만).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종 여성을 좋아합니다. 나는 그들의 비관습성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예민함을 좋아하고 그들의 익명성을 좋아하지요." 내가 ‘나의 그녀’ 시리즈를 쓰는 것도 같은 이유다. 울프는 내게 동류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어떤 여자들을 보면 어떻게 저토록 사랑스러울까, 싶은 연대를 넘어선 사랑을 느낀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아니고서는 표현하기 어려운 깊은 영혼의 만남이다.


남편과 결혼을 하던 시기에 나는 남편을 사랑했지만 몹시 외로웠다.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어서 결혼을 택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몰랐고 결혼이 우리의 교류를 더 깊게 해 줄 거라고 착각했다.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나는 정신적 외로움을 해결하지 못했고 오히려 더 큰 외로움을 느꼈다. 남편에 대한 갈증을 버리기 위해 책과 음악과 예술을 끊었다. 내가 깊어지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때는 남편 아니라 그 누구와도 해결될 수 없는 고독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다.

나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많은 여자들이 이런 부부간의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동안 많은 여자들에게 옆집 아줌마로서 부부상담을 해왔는데 나의 결론은 항상 남편과는 섹스만 하고 대화는 여자들끼리 하자,였다. 실제로 수많은 옆집 아줌마 덕에 그나마 나의 지성과 감수성을 유지하며 살아냈다.


비타 색빌 웨스트가 그녀의 작품 <올란도>의 모델이라고 한다. 하지만 올란도라는 인물에는 울프 자신이 가장 많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작가니까 당연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던 삶의 모습을 소설 속 주인공이 살아줘서 행복했을 것 같다. 그것도 영혼을 나눈 연인과 자신을 녹여 만들어낸 주인공이라면 더욱.

“호전적인 야심이나 권력욕, 온갖 남성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편이 나아. 인간의 영혼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황홀함을 더 속속들이 느낄 수 있으려면. 사색과 고독, 사랑을 만끽할 수 있으려면.”

전쟁이나 가난 등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세상에 이상적인 인간형을 만들어내어 불멸의 존재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작가만의 권리이자, 기쁨일 것이다. (바로 그것을 정세랑이 또 해내고 있다.)


그녀가 내게 준 행복은 이토록 커다란 것보다는 아주 소소한 것 속에도 있다. 예를 들면,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것이나 다름없는 단 하나의 재능-작은 것이지만 소유자에게는 소중한-이 소멸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나 자신, 나의 영혼도 소멸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 문장을 보면 그녀가 100년의 세월을 날아와 가만히 내 어깨를 안아주는 것 같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기며 길거리를 배회하고 사고의 낚싯줄을 강속에 깊이 담글 수 있기에 충분한 돈을 여러분 스스로 소유하게 되기 바랍니다. " 자기만의 방에서 방만큼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이 돈인데, 이 문장에서 기본소득이 떠오르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물론 그녀가 자립을 위한 돈을 말할 때는 노동권이 먼저 떠올랐지만, 앞의 문장은 자립보다는 노동하지 않고 휴식과 사색을 누릴 권리가 분명하기 때문에 지금 시대에는 기본소득과 연결지을 수밖에 없다. 시대적 인물의 발언은 그 시대를 훌쩍 넘어와서도 그 빛을 발한다.


나는 지금 자기만의 방에서 창작과 사색과 예술을 위한 공간과 시간을 누리고 있다. 50년을 생활인으로 살아온 내게 주어진 보상과도 같은 시간이다. 액면 그대로 창작과 사색과 예술이 아니더라도, 개인적 삶을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아이들이 컸고 내 생활이 보장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가족들, 특히 남편과 서로의 삶에 대한 경계를 잘 구분 짓고 보장해주며 살아온 덕분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거나 요구하지 않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정신에 대해 과하게 궁금해하고 간섭하지 않는 존중감이 우리는 서로에게 있다. 나의 그녀들, 앞서 살아온 수많은 버니지아 울프들이 만들어준 고귀한 선물이다.


“1866년 이래 영국에는 여성을 위한 대학이 적어도 두 곳 존재해왔으며 1880년 이후에는 기혼 여성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도록 법적으로 허용하였고 1919년에 여성은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전문직이 여러분에게 개방된 지 대략 10년 정도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릴까요? 여러분이 이 막대한 특권들과 그것들을 누릴 수 있었던 기간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기회가 부족하고 훈련이나 격려를 받지 못했으며 여유와 돈이 없다는 변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자신과 같은 여성들이 함께 연대해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뼈아픈 호소였기에 지금까지도 이토록 유효할 것이다.

아프게 기억해야 한다. 그녀들 덕분에 누리게 된 수많은 권리와 자유를. 더 이상 개인적 실천인 '자기만의 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주어져야 하고 더 넓은 공적 공간과 정당한 노동권과 기본소득이 주어져야 한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 “인생이란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니까.

그녀만 보면 나는 전사가 된다.





이전 08화나의 그녀, 정세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