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함의 힘
작가 이도우 님의 에세이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헉, 여자잖아!
솔직히 살짝 실망했다. 책을 읽는 내내 이토록 부드럽고 따뜻한 남자라니 너무 좋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존재하는구나, 행복감에 젖어있었는데, 이렇게 완벽하게 속이다니. 아무도 속이지 않았는데 나 혼자 속고 나 혼자 배신감에 부르르 떨었다. 아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의 은섭에게 작가를 이입했던 것 같다.
드라마도 보았지만, 드라마보다 책이 훨씬 좋았고 드라마를 보지 않았더라면 책을 더 재밌게 읽었을 거 같아 드라마를 먼저 보지 말걸,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드라마 덕분에 이도우 님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다만 책 읽는 내내 서강준의 얼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폐해를 겪어야 했다. 물론 서강준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강력해서 다른 상상의 여지가 없었다는 뜻이다.
은섭은, 아니 이도우 님은 은섭보다 몇 살 더 나이가 많은 30대 후반의 미혼 남자로, 살집이 조금 있어서 푸근해 보이는, 살짝 촌스럽기도 한 남자일 거라 상상했다. 평소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남자에 대한 선망이 생겨났다. 남자일 거라 생각했으니까 더 좋았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그 말 그대로야. 항상 너한테는." 이런 말은 남자가 해야 의미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작가가 여자의 감수성을 가진 남자이기를 바란 것이다.
이도우 님이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마치 그림책 속 곰이 둔한 손으로 꼼지락거리다가 디즈니로 휙 날아가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작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내게 이토록 중요했을 줄이야. 그만큼 은섭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 같다. 은섭과 같은 감수성을 가진 남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가 필요했나 보았다. 그것은 남자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반면 이도우 님이 남자가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여기, 그녀 이야기로 쓸 수 있게 되었으니. 그녀의 포근함을 자랑할 곳은 다른 어디가 아닌 딱 여기여야 한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채고 나니, 왜 남자라고 착각했을까 싶을 정도로 여자임을 드러내는 내용이 여기저기 많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시 자리를 잡고 완벽해졌다.
어릴 때부터 여자를 참 좋아했다. 여자 형제가 많고 여학교에 다녀서 그런지 여자들에게서 안정감을 느꼈다. 여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그녀들이 너무 예쁘다는 생각에 빠져들곤 했다. 인간적으로 멋졌다. 멋진 그녀들에게 자주 반했다. 이렇게 예쁜 여자들이 왜 남자들만 만나면 바보같이 구는 걸까, 이상했다. 남자들은 왜 이렇게 예쁜 여자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나, 의아해하면서.
여자들과 지내는 데 익숙해져서 그런지 남자들은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유일한 남자인 아버지도(남동생이 있지만 새끼손가락 빨게 해 주며 키웠으니 내 눈에는 애기다) 조금 불편했다. 남자들과 편하게 눈 마주치고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은 아이들 키우면서 수더분한 남자들을 만나고 난 다음이었다. 왜 그동안 저런 남자들을 못 만났을까 했는데, 뻣뻣하던 남자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수더분해지는 거였다. 지금도 시커멓게 털 난 남자들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다. 무섭다기보다는 더럽다고 표현한다. 깨끗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질이 더럽다는 뜻이다. 어쩌면 <사랑이 뭐길래>나 <엄마가 뿔났다> 같은 가부장적인 모습의 아버지가 나오는 드라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드라마가 주는 영향이 이토록 크다(참고로 우리 아버지는 성질 더러운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엄마가 더 세서 기죽은 남자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세상에는 좋은 드라마도 많고 좋은 책도 수없이 많다. 하지만 작가나 피디의 의도와 상관없이 어린 나는, 독자와 시청자들은 자극적인 것에 먼저 눈이 간다. 영상물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반드시 지도편달이 필요하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많이 편협한 시각으로 보아왔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더욱더 이도우 님의 책은 순한 영향력을 가졌다. 순하고도 선했고, 선하고도 따뜻했다. 그녀의 감성이 자꾸만 몰랑몰랑하게 스며들어와 쓰고 싶게 만들고 부드럽게 만들고 웃게 만들었다. 읽는 내내 페이지 수가 줄어드는 게 아까워서 읽다 말고 수시로 책을 덮고 웃으며 돌아다녔다. 남편이 왜 그러냐고 하면 괜히 옆에 가서 팔짱을 끼고 앉았다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내가 좋아했던 책들은 영혼을 일깨우거나 정신이 번쩍 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도우 작가의 책은 완전히 다른 좋음이다. 일깨우고 번쩍 뜨이게 하고 흥미를 끄는 류가 아니라, 그저 살고 싶게 만든다. 살아도 될 것 같다. 봄볕 같아서, 봄바람 같아서. 이렇게 온화하다면 살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그만 느슨해진다. 그녀와 함께라면, 그녀의 글과 함께라면 온순하게 길들여지고 싶다.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에서 나뭇잎 소설들은 책 속의 또 다른 오아시스였다. <할머니의 소다 비누>는 일단 발을 동동 구르고 다시 읽고 쿠션에 머리를 박고 배시시 웃었다. 몇 번이나 봤던 작가 소개를 다시 읽었다. 혹시나 발견하지 못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이름 끝에 쩜쩜쩜 나뭇잎을 따라 아무것도 없는 흰색 종이 위를 뚫어져랴 쳐다봤다. 아쉬웠다, 그녀를 더 알고 싶었다.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절대 그녀를 만나지 말고 상상 속에 두어야지,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감수성을 애써 외면해왔던 것 같다. 감수성을 가진 여자들이 내 앞에서 웃었을 때 나는 그녀들에게 반했지만 애써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여겨왔던 것 같다. 바람을 이기려는 나그네처럼. 그것은 어쩌면 내가 작가가 되기를 거부했던 것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허물어진다. 햇빛 쨍쨍한 날의 나그네처럼.
음, 더 솔직해지자. 그녀의 책 덕분에 내가 여자인 것이 좋아졌다. 사실 나는 내가 여자인 것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또! 딸이어서 부정당했던 기억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고 쉽게 이겨내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내가 좋아지긴 했지만.
자세히 돌아보면 남들보다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민감성은 나를 꽤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어준 것 같다. 가끔 버겁기도 하지만 모르고 사는 무지함(어리석게도 배려심이 부족한)보다 여자여서 키울 수 있었던 내 민감성이 좋았다. 여성학자 정희진 님이 ‘여성 됨은 고통이자 자원’ 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면, 이도우 님은 내가 여자여서 좋다!라고 확실하게 일깨워주었다.
<싱어게인>의 이승윤은 자신을 배 아픈 가수라고 했다. 질투가 창작의 동력이라면서. 나도 괜찮은 작가를 보면 항상 배가 아팠다. 감히 내가 견주지 못할 작가여도 그랬다. 배 아파하는 내가 싫지 않았다. 그런데 이도우 님 앞에서는 전혀 배가 아프지 않다. 그녀의 존재가 감사할 뿐이다. 이럼 안 되는데. 배 아파야 하는데. 같은 창작자로서 마냥 고맙기만 해서야 쓰나...
그녀는 나를 완전 무장해제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