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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Dec 18. 2020

나의 성격유형은?

성격유형검사들 중에 에니어그램을 가장 선호하는 편이다. MBTI가 더 대중적이긴 하지만 내게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은 아니다. 에니어그램은 인간을 9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나는 5번에 해당한다. 그런데 어젯밤 책을 읽다가, 내가 5번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그게 왜 충격이냐면 나는 너무나 확고히 5번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나를 성찰하는 데 엄청나게 많은 영향과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검사를 통해 결과가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의 유형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5번인 것 곧바로 순순히 인정했다. 아이가 탁자에 머리를 부딪혔을 때도 놀라 소리치면 아이가 더 놀란다는 사실을 그대로 실천할 줄 알았고, 남편의 비리를(오해였지만) 들었을 때 손을 벌벌 떨면서도 어떻게 문제를 처리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다만 약간 부끄럽게 여겼는데, 5번은 머리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9가지 유형은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2,3,4번이 가슴형, 5,6,7번이 머리형, 8,9,1번이 장형이다.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무엇이 먼저 움직이느냐에 따라 분류된다. 나는 장형이기를 바랐다. 어느 광고에서처럼, ‘생각만으론 아무것도 아냐, 해야지.’라고 생각했다. 머리형은 왠지 생각만 하는 유형인 거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무 살 무렵에, 사는 게 뭔지 모르겠다고 머리 아프고 괴롭다며 휘청거렸다. 그때 아는 언니가 내 사주를 보고 10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1. 행동하라. 2. 생각은 그만하고 행동하라. 3. 생각을 멈추고 행동하라. 4.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행동하라... 등 10번까지 모두 행동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 행동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느라고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너무너무 부끄러웠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 조언은 나를 크게 바꾸어주었다. 그 뒤로 나는 8번에 가까운 행동형이 되었다. 


각 유형은 번호로 매기지만 알기 쉽게 별명을 붙이기도 한다. 1. 개혁가, 2. 돕고자 하는 사람, 3. 성취하는 사람, 4. 개인주의자, 5. 탐구자, 6. 충실한 사람, 7. 열정적인 사람, 8. 도전하는 사람, 9. 평화주의자 등이다. 내가 처음 에니어그램을 배울 때는 이런 별명이 없었고 긴 설명으로 대신했었다. 그래서 이 별명이 적절하다 싶기도 하지만 내가 알던 특징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 유형도 있다. 4번 개인주의자가 특히 그러하다. 내가 아는 4번은 예술가였다. 8번 도전하는 자도 그렇다. 내가 아는 8번은 행동하는 리더였다.    

  

나는 8번 유형의 점수가 매우 높은 5번으로, 4번 날개를 달고 있었다. 날개는 성격유형 외에 느낌이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나는 4번 날개를 달았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졌다. 왜냐면 나는 예술가를 선망했기 때문이다. 비록 머리형의 5번이지만 예술가적인 섬세한 면을 가진 이들을 동경했고 그들의 삶이 값지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지만 시나 감수성 짙은 글보다 비평을 담은 에세이를 썼다. 소설을 좋아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웠고 철학서 같은 인문서가 더 쉬웠다. 통찰력이 있는 편이라 카운슬링이나 정책제안을 하면서 기획자로 살았다.     


안으로 움츠러들게 된 어느 날, 건조체 말고 말랑체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제안서 같은 거 말고 글다운 글, 시 같은 글, 그림 같은 글이 쓰고 싶었다. 난생처음 그림도 그렸다. 시를 써보겠다고 시공부를 하고(여전히 읽지는 않았다. ‘시 읽는 사람이 싫다’는 제목의 시를 썼다.), 한동안 접어두었던 소설을 와장창 빌려와서 읽었다. 하! 어이가 없었다. 한때 문학소녀였고 문학 출판계에서 일한 적도 있는데,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느낌이 들 정도로 장르물이 여기저기 침범해 들어와 있었고(그래서 환호했다.) 모르는 소설가들도 많았다. 재밌었다. 낯선 세계를 둘러보면서 하얀 눈밭에 내 발자국을 남기는 기분이었다. 진짜로 나도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 내 눈앞에 그림책이 나타났다. 아이가 어릴 때 독박 육아의 고립된 생활 속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어둡고 지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나를 도닥여주던  그림책. 그걸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민감하고 안으로 움츠러드는 유형. 생각이 많고 소심함. 다른 사람들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 유지.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과 특별한 결함이 동시에 있다고 여김. 사회적인 기술이 부족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들과는 깊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있음. 통찰력이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음. 자신을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함. 너무 효율적이거나 너무 행복한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함. 예술적인 작업을 통해 간접적으로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함. 만성적이고 장기적인 우울증과 무력감을 갖고 있음.       


이 글을 보는 순간, 이건 나잖아, 를 외쳤다. 감추고 싶었던 비밀 같은 것이었다. 아닌 척하기에는 너무 적나라했다.

고3 때 내 꿈은 바닷가에서 서점을 하면서 책을 읽으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대학에 가면 부지런히 알바를 해서 서점을 열 수 있는 돈을 모으리라 작정했었다. 바닷가여야 하는 이유는 책만 읽을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풍경을 보며 걷고 싶었다. 그리고 한적해야 했다. 사람이 많이 와서 나를 귀찮게 하면 안 되니까. 책이 가득 쌓인 곳에 갇히고 싶지만 먹고살 궁리로서 서점을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서점을 하면 혼자 먹고 살 정도는 되었으니까, 는 지금의 생각이고, 그때는 먹고사는 것에 대한 고민 자체가 없었다. 노동에 대한 어떠한 고민도 하지 않았을 때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보고 들은 게 있어서 노동하고 자립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기는 하지만, 실은 자립하기에 너무 사회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기를 바라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두렵다.  

단둘이 이야기하는 건 잘하지만 세 명만 되어도 불편해했고, 내가 행복할 때마다 다른 누군가의 불행을 눈감는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통찰력을 가지고 제안서를 쓰기는 하지만 나의 제안은 대부분 이상적이라는 말을 들었다.

안으로 움츠러들던 시기에 나의 어두움을 글과 그림으로, 예술로 해소하려 했던 것도 내가 4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그래도 '개인주의자'라는 별명은 마음에 걸렸다. 내가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개인주의로 살기에는 사람을 너무 좋아했고 공동체를 꿈꾸며 기대고 살았다. 하지만 어제 읽은 책의 주인공은 딱 내 모습이었다. 조경란 님의 <풍선을 불었어>라는 단편집이었다. 그중 <마흔에 대한 추측>에 4번 유형인 주인공이 나온다. 그녀의 행동, 남들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다거나 함께 게임을 하기보다 관찰하기를 즐기는 등 지극히 개인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어쩐지, 5번 유형이라고 하기에 탐구형이라는 표현은 내게 어울리지 않았다. (내가 아는 5번은 사색가이다.) 스무 살 무렵에 생각만 하지 말라는 조언은 탐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오라는 의미였다. 이리저리 재지만 말고 뭐든 부딪혀보라는 것.      

내가 4번이라는 말은 머리형이 아니라 가슴형이라는 뜻이다. 이성적인 머리형이 아니, 원했던 장형도 아니고 감성에 움직이는 가슴형이라니, 쉽게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을 보라. 나이 50이 넘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작가가 되겠다니 나서지 않았는가. 우연히 본 땅을 사겠다고 바로 전세를 빼고 땅을 사서 기어이 집을 짓고 살았던 일이 떠올랐다.     

 

9가지 유형 중에 하나가 내 성격을 대변하기는 하지만, 에니어그램의 목표는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자신의 유형을 강화하지 말고 부족한 다른 부분을 북돋아 균형을 가지라고 한다. 원래 4번이었지만 8번을 강화해서 살았다가 5번을 강화해서 살면서 균형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성격이라는 게 이렇게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바뀌는구나 싶다가 성격이 바뀔 만큼 환경과 조건이 크게 변덕을 부렸단 말이지 하고 스스로를 측은해했다가, 사실은 성격유형검사라는 것이 그저 꿰어 맞추기 식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도 이른다. 이런 걸 믿고 나를 이해하는 도구로 삼아도 되나 싶어서.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 불안이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방향을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나를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 아닐까.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글을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발견하는 글, 닫히지 않은 글이 내게 남았으니 겨울밤 잉걸을 바라보듯 만족스러워해도 되겠다.

음. 사색을 하는 걸 보면 역시 5번인가? 

아니, 글로 남기는 걸 기뻐하니 4번인가?

5번이건 4번이건 필요할 때 내 맘대로 꺼내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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