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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an 28. 2021

나의 그녀, 툰베리


굿즈가 나왔다.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밴드 국카스텐의 굿즈. 내게 덕질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덕질에 대한 책을 냈다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https://brunch.co.kr/brunchbook/geokjil).

평소에는 공연을 볼 수 있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가끔 굿즈도 사는 현명한 덕후 생활을 해왔지만, 코로나로 공연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터질듯한 덕심을 주체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런 덕후들을 위해 굿즈가 준비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 내가 가장 사지 않는 옷, 전부 옷이다. (의류산업은 항공산업 다음으로 오염물질을 많이 배출한다.) 가장 사고 싶은 옷은 덕주가 직접 그린 멤버들 그림이 그려진 옷인데, 목 관절 질환으로 절대 입을 수 없는 후드 티이다. 그럼에도 사고 싶다.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십 번도 더 들여다보고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결제 직전까지 갔다.      


환경운동연합이 처음 활동을 시작할 무렵 나도 환경문제에 대한 강의를 들으면서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다. 다른 사회운동에 비해서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좋았다. 각자 실천할 수 있는 수위가 다를 수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 서로 인정해주고 자신의 속도와 방법으로 참여하게 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린스를 안 쓰는 것이 현재 자신이 실천할 수 있는 최대치인데 누군가는 노푸(물로만 씻는 것)를 한다고 해서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강압적이지 않아서 좋았고 일상을 조금씩만 바꿔도 실천할 꺼리들이 많아서 좋았다.  

    

어느 날부터 옷을 사지 않고 있다. 옷 주는 거 좋아하는 시누이가 있고, 내 몸에 딱 맞는 옷들이 와르르 나오는 교회 바자회가 있었다(놀랍게도 남편과 내 몸에 딱 맞는 옷들이, 그것도 아주 고급스러운 것들로 수년째 나오고 있었다). 작년 코로나로 바자회가 없을 때였다. 남편이 갑자기 등산을 다니겠다고 하면서 등산복을 사야 하는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우리는 인근에 아름다운 가게를 찾아냈다.   


그녀 툰베리를 알게 되었다. 툰베리는 '미래를 위한 금요일'이라는 등교거부 시위를 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학교 대신 의회로 가서 지금 당장 기후를 위한 국제적인 행동을 하라고 촉구했다. 툰베리는 우리가 그동안 문제의 핵심을 향해 나아가기보다 개인적으로 노오력하는 방식으로 참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녀는 우리 세대들이 해오던, 내가 해오던 개인적이고 생활적인 실천 방식에 질문을 던졌다. 국가적이고 세계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운동의 차원을 끌어올리자고 주문했다. 모르겠다. 공부가 얕아서 이전에도 이미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는. 중요한 것은 내가 프레임이 깨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었다. 다만 조금 확장해볼 용기를 내게 되었다. 밴드(네이버)를 만들었다. 푸드 마일리지를 지키고 나눔과 직거래가 가능한 밴드.  

내가 살던 곳은 인구 만 명 정도의 작은 지역사회였다. 산봉우리를 넘어 넘어, 물길 따라 굽이굽이 들어와서 야트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강을 건널 때면 바깥세상의 때 묻은 모든 것을 내버리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환경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아직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곳이었다.  

푸드 마일리지가 높은 타 지역의 농작물을 마트에서 사기보다 집 앞의 밭에서 직접 살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뭔가 필요할 때 혹시 샀다가 쓰지 않는 사람은 없는지 물어보면 어디선가 누군가가 나타났다. 쓰다가 버리기 전에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물어보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인 듯해도 누군가에게는 요긴하게 쓰였다.


가끔은 눈 오는 날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소소한 안부가 올라오기도 했고, 덤프트럭이 많아진 이유와 더불어 마을의 문제를 공론화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툰베리만큼 세계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은 못되더라도 지역 안에서라도 공적인 공간을 만들어 직접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어서 자부심도 생겼다.    

요즘은 당근마켓이라는 어플이 지역마다 생기고 있다.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대부분의 내용이 그 어플에서 실행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애초에 그것은 기후와 환경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개인의 소소한 경제활동에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세상에는 비슷한 목적과 비슷한 내용을 담을 것들이 많다. 그러나 그 방향성과 의미가 같지 않다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후에 <놀면 뭐하니?>프로그램에서 당근마켓을 이용하는 위드유 편을 보았다. 함께 고기 먹을 사람을 구하고 주식을 이야기하는 모임을 하고 잠시 가게를 봐줄 사람은 구하는 걸 보며 사람이 무섭다는 요즘 세상에 있을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싶었다. 특히 중년 여성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준 모습은 아주 훈훈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데 당근이 기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유재석이 온다면 어디라도 따뜻해질 것이지만.)

      

굿즈는 나를 흔들어놨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보름달, 습기를 머금은 밤의 냄새, 덕주가 좋아하는 초록의 풍경만 보아도 추억을 되새길 수 있고 향수에 젖을 수 있었다. 경험상 굿즈 옷이 내 체형에 맞지 않아 그동안 굿즈 앞에서 초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ALL ARTWORK BY 덕주! 입을 수 없어도 걸어두기만 해도 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스스로 합리화하게 되었다.

그때, 고맙게도, 툰베리 그녀가 한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새 옷을 사지 않겠다! 성인이 된 그녀가, 꽃다운 나이의 그녀가. 하필 그때 그녀의 인터뷰가 내 눈에 뜨인 것이다. 굿즈를 실용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멈춰야 할 이유가 생겨버렸다. 봤으니까.

국제적인 행동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개인적 실천도 중요하다. 당연하다. 그 당연한 사실을 그녀, 툰베리로부터 다시 바로잡는다.


덕후가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선은 바로 내 삶의 기준이다. 덕질이 주는 행복감은 그 기준 안에 있을 때 무한히 위력을 발한다. 툰베리는 다시 한번 그 기준이 되어주었다. 나의 덕심에 균형을 잡아주다니, 역시 그녀는 나의 그녀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도 툰베리들이 있다. 작년 ‘청소년 기후행동’ 소속 청소년 19명이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청소년들의 헌법소원 청구는 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리나라가 처음이라고 한다. 며칠 전에는 포르투갈 남매 소피아와 안드레 올리베이라가 유럽 국가를 상대로 기후변화에 대한 소송을 제기했다.  

사실 툰베리는 나의 이상형이다. 이렇게 말하면 웃기지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툰베리 같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다시 태어난다면, 이라는 상정 자체를 몹시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이다. -툰베리처럼 대쪽 같은 정치적 소신을 실천하며 살고 싶다. 이왕이면 튼실한 여자로 태어나 제대로 뜻을 펼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등교거부를 제안한 적이 있다. 정확히 어떤 정치적 이슈인지는 잊어버렸다. 아이에게 자세히 설명해주고 의견을 물었는데 그러겠노라고 해서 등교거부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교장이 아이와 면담을 했는데 아이가 잘 모르겠다고 한다고 전화가 왔다. 아이가 충분히 내면화하지 못한 것을 행동하게 하려 했구나, 몹시 부끄러웠다. 내 뜻을 아이를 통해 실현하려고 하지 말자, 다짐했다. 그 뒤로 절대 나의 선택은 오로지 나를 위한 선택이 되도록 노력했다.

어른이 되면서 많은 것들을 타협하고 산다. 나중에는 타협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나 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조금씩 조금씩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낡아진다.  


그래도... 딱 하나, 반팔 티셔츠 하나를 샀다. 여름 내내 입을 것을 다짐하면서. 기본 욕구를 너무 조이지는 말자, 면서...








올리려고 보니 툰베리를 언급하기에는 너무 하찮은 고민이었던 것 같아서 미안하고 부끄럽다.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 내가 겪은 일을 너무 큰 것에 비유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받은 적이 있다.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나 보다. 어쩌랴. 보는 것은 크고 겪는 것은 이토록 하찮으니... 하지만, 사람은 의외로 말도 안 되게 작은 것들로 흔들리곤 하니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는 것 아닐까.



사진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977348.html?_fr=m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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