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처럼 봄이 훅 다가선 어느 따뜻한 날이었다. 바람에 밭 딸기향이 그득했던 걸 보면 어쩌면 조금 더 봄이 익은 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 숨이 내게 전화를 했다. 빨리 와주세요. 빨리요.
우리는 그 아이가 정학 문제로 딱 한번 만난 사이였다.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발견한 숨은 친구들에게 해맑게 인사를 했다. 안녕, 내일 봐. 내 차에 훌쩍 올라탄 그녀는 차가 출발하자마자 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지금 당장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서 아줌마를 불렀다고, 오늘은 그런 날이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녀는 오빠에게서 성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지속되었는데 가족들도 알지만 오빠가 난폭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 집을 떠나 있던 오빠가 주말에 온다는 연락을 어제 받았다고 한다. 그 아이는 겨우 중3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아이의 작은 손을 꼭 그러잡았다.
숨과 함께 여기저기 도움을 청하러 다녔다. 보호소도 알아보고 상담센터도 알아보고 숨의 엄마도 만났다. 숨의 엄마는 딸기밭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눈을 들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숨의 엄마도 상담과 치료가 필요할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보다 손 내밀 곳이 별로 많지 않았고, 대부분 거절당했다. 아직 중학생이라는 것이 보호해주어야 할 이유인 것 같은데 학교 문제도 있고 아직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나이라서 보호해주기 어렵다고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담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골초였다.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웠고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손을 떨었다. 아마 손을 떠는 만큼 숨쉬기 힘든 상태였으리라. 하지만 그 아이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어려움 따위는 고려되지 않았다. 그 아이도 노력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담배를 들지 않기 위해 뜨개질을 했고 몰입하기 좋은 추리소설도 읽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위험은 단기간에 닥쳐왔다.
결국 우리는 아무것도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그렇게 결정했다. 잠시 숨 쉴 수 있었다는 말을 했던가. 그 뒤로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당장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순간을 어떻게 버텼을지 모르겠다. 숨은 친구도 그런 일을 겪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 친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친구가 미칠 것 같을 때 그 아이를 불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때로 손목을 긋기도 했다.
숨을 만나고 나서 나는 취약계층을 돕는 학부모 봉사활동을 접었다. 내가 골초가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과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과, 해결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때로 얼마나 하찮은 일인지 알아버렸다. 그럼에도 그녀 숨이 함께 울어주던 어른이 내 삶에도 있었지,라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녀 자신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 숨을 떠올리면 보르헤스의 말이 떠오른다. "인생에는 약간의 좋은 일과 많은 나쁜 일이 생긴다. 좋은 일은 그냥 그 자체로 놔둬라. 나쁜 일은 바꿔라. 더 나은 것으로. 이를 테면 시 같은 것으로. "
언젠가 그 아이를 만나면 나는 그 아이 손을 잡고 우리는 이미 시를 써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아이가 살아남았다면 그것자체가 시다.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그대, 숨이여. 잘 살아 있으라.
가끔 삶이 지칠 때면 그 아이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어, 나와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며 제 할 일을 하고 있어,라고 되뇐다. 숨의 작은 손을 잊지 않기로 한다. 그 아이의 아픔을 누군가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