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구분

나의 감정의 근원을 찾아

by 천둥

아이가 다니던 대안학교를 나오면서 상담을 받았다. 다행히 상담효과가 높아서 마치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마음이 해맑아졌다. 결혼 후 해결되지 못했던 남편에 대한 문제도 정리가 되었다.

사람은 모두 나와 다르다는 것은 말이 그저 말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달라서 소중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감정과 느낌을 잘 들여다보고 나의 문제인지 바깥에서 일어난 문제인지 구분하게 되니까 감정 컨트롤도 잘 되었다. 마음에 애정이 가득 차 있는 기분이었다.

그 무렵 그녀, H를 만났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너는 어떻게 그래? 화 안 나? 왜 화 안 내? 어떻게 상대와 나를 무 자르듯이 잘라낼 수 있어? 끊임없이 물었다.

나는 잘라내는 게 아니라 구분하는 거라고 말했고 상담 덕분이라고 말했다. 마음이 편안하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녀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활동력이 왕성할 때라 일을 많이도 벌였고, 그녀는 기꺼이 나와 함께 했다. 10여 년이 흘렀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내게 물었다. 어떻게 그래? 오랜 시간 지켜봤는데 아직도 묻는다면 전해지지 않을 마음인가 보다 생각했다.


“살다 보면 힘든 날이 있을 거예요. 그럼 또 오세요.” 상담 선생님은 떠나는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살다 보니 힘든 날이 왔다. 내 안에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음을 느꼈다. 애정으로 대했던 이들과 서로 할퀴고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나는 점차 자기 확신을 잃어갔다. 내가 나로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녀를 떠나고 사람들을 떠나기로 했다. h는 아쉬워했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녀를 떠났다.

그리고, 상담보다 록음악을 택했다. 나 대신 소리 질러주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음악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탄산수처럼 나를 흔들어 되살려놓았다.


어느 날 그녀는 장애인 지원센터에서 일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전화한 그녀가 장애인이 내 기대에 응해줄 거라는 기대가 1도 없기에 그들에게는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그들에게서 힘을 받는다고 했다. 그동안 사람에 대한 기대 때문에 화도 나고 힘들었던 것 같다면서. 사람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으면 평정심이 유지되느냐고 물었다. 내가 화내지 않고 감정적이지 않았던 날들을 그렇게 이해한 것 같다.

나는 상대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대는 상대의 마음대로 할 자유가 있고 나와는 다른 개별적 존재니까.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기대하지 않는 마음이 내게 전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 못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힘든 날이 오면서,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식으면서 나는 분명 사람들을 무시했던 것도 같다. 다르다는 인정과 동시에 기대감을 놓아버렸다.

그녀의 질문이 답답하거나 반복된다고 느끼면서 점차 겸손하지 못했고 오만해지기도 했다. 애정 하는 마음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기대하지 않은 것에서 오는 안도가 되어버린다. 작지만 완전히 다른 방향이다. 그녀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 작은 틈새를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그림책 <두 사람>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두 사람은 두 섬처럼 함께 살아요. 함께 바람에 휩쓸리고 노을에도 함께 물들지요. 하지만 두 섬의 모양은 서로 달라서 자기만의 화산, 자기만의 폭포, 자기만의 계곡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녀와 나는 오랫동안 같은 일을 겪었지만, 각자의 내면에 다르게 새겨졌을 텐데 나는 그녀가 내가 느낀 대로 느꼈으리라 생각했었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오만한 태도로 무시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을 못했다.

H, 그녀와 나는 서로를 비춰 보는 거울이었구나, 깨닫는다. 그런데 두 개의 거울로 서로의 뒤편까지 보려고 애쓰고 있다. 상대의 뒤편을 내 거울로 보여주면 되었을 텐데.


이제는 H를, 또는 다른 사람들을 온전히 다르게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만일 힘들었던 그 순간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관계 설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시절 인연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아쉽지만 우리의 시절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가끔은 잊히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 시절 누구보다 서로를 향했던 순간이 많았기에. H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사진출처 https://pixabay.com/illustrations/mysterious-island-full-moon-magic-4848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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