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군은 누구인가

주군이시여

by 천둥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혼돈에 빠진 적이 있다. 혼돈이야 늘 있지만 영 길이 안 보일 때에는 나를 이끌어줄 어른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말을 하기에는 이미 내가 어른인 것도 알지만 그래도 답답할 때면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여자로서 시대의 어른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한탄했다. 나는 이를 주군이라 표현하곤 했는데, 여기서 주군이란 일종의 리더이자 스승과 같은 의미였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좋아해서 자주 사용해왔다. 무조건 따를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런 관계가 형성된, 또는 형성될 사람이라는 뜻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내 젊은 날을 통째로 이끌어주던 주군이 있었다. 바로 h형이다. 남녀 모든 선배를 형이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나는 언니가 둘이나 있어서 그런지 언니라 부르는 게 편했다. 하지만 h형만은 형이라 불렀다. 그 형은 형이라 불러야 맛이 나는 중성적 매력이 강한, 말 그대로 형의 매력을 가진 형이었다.


h형을 처음 본 것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부르던 시기, 수업거부에 대한 토론을 하던 자리였다. 선배들이 1학년들을 잔디밭에 모아놓고 왜 수업거부를 해야 하는지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묘한 모습의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h형이었다. 선배들이 우르르 일어나 인사를 했고, 형은 허허허 웃으며 손짓으로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 기껏해야 키가 160 조금 넘을 것 같고 비쩍 마른 몸이었는데도 마치 거인 같은 아우라가 있었다.

긴 커트머리에 허름한 청바지를 입었고 얼굴이 햇빛에 많이 그을렸는데 눈만은 형형했다. 눈만이 아니라 온몸에서 빛이 났다. 사람에게서 빛이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처음 알았고, 홀딱 반했다. 목소리가 아주 허스키하고 낮으면서도 힘 있고 말도 어찌나 자분자분 잘하던지. 동시에 허허 허당끼 가득하게 웃으며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끔씩 눈웃음을 지으면 눈가에 서글서글해지는 주름조차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내 눈앞에 나타난 h형이 어느 날 나를 콕 집어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왜 저를요? 되물어보면서 얼마나 설레던지. 말을 전해주던 선배들은 조심하라고, 그 형 무서운 사람이라고 겁을 줬다. 운동권 중에서도 운동권이라는 건데, 멋모르는 나는 운동권이 뭐가 그리 무서울까, 저렇게 멋진데, 했다.


그렇게 형을 만나 남다른 관계가 되었다(형이 나를 콕 집어 찾은 것은 운동권이었던 내 언니 덕이다. 우연히 언니와 h형이 만났고 내 동생 운운하면서 h형은 그 언니에 그 동생이겠지 착각했다고 한다). 그 형이 만든 동아리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나는 형과 내가 친하다는 사실이, 그리고 남다른 관계라는 사실이 몹시 자랑스러웠다. 형은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다니면서 내 새끼다, 하면서 이뻐해 줬고, 형이 없을 때도 주변 선배들은 내가 형의 동아리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하게 대해줬다. 그만큼 형은 학교 모든 선배들에게 존중받는 사람이었다.

동아리에서 우리와 놀 때도 형은 후배들이 뭘 좋아하는지 잘 알아서 항상 우리를 웃게 해 줬다. 유머러스했고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허당끼를 정말 매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완벽한 모습은 약간 빈 구석이 있어야 한다는 걸 내게 심어주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완벽주의를 추구했다. 시간도 철저히 지키고 해야 할 일도 그랬고 말도 어떻게든 똑 부러지게 하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나는 그런 불편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나로 인해 조금 불편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제가 없는 사람들이 싫었다. 수업을 제치고 술 마시고 시간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경멸했다. 그런 내가 형을 만나면서 털털하고 약간 빈 구석이 있는 것이 더 매력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덕분에 나는 너무 비게 되었다...)

또 나는 천성이 게을러서 뭐든 좀 미루는 편이었다. 어느 날 형이 동아리 탁자 위에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 죽으면 썩을 몸 아껴서 뭐하냐, 해버리자 라며 어떤 일을 시작했는데 그게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나도 뭐든 벌떡 일어나 움직이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형과 달리 남들도 그러기를 바란다는 게 문제지만...).

생각해보면 어른들이 자주 하던 흔하디 흔한 말이었는데 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게 뭐든 내게는 명언이 되어버리는 효과가 있었다.


대학에서 하던 거의 모든 활동과 사회로 진출할 당시, 그리고 연애에 있어서도 형에게 조언을 구했다. 조언이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허락에 가까웠다. 연애 문제는 약간 오해가 있긴 했다. 갑자기 남자의 대시를 받은 내가 당황해서 새벽부터 형을 쫓아갔다. 형, 어쩔까? 내 물음에 형은 그 친구 괜찮다는 말 많이 들었어. 잘해봐,라고 나의 연애를 응원, 나로서는 허락을 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연애를 하면 결혼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고, 형의 허락은 거의 절대적이었으니 나는 당연히 그와 결혼까지 했다. 그런데 나중에 형이 내가 만나는 남자를 보고 어찌나 당황하던지. 형은 그날 다른 사람을 떠올렸던 것이다. 헐~ 그러거나 말거나 허락은 있었고 연애는 이미 시작한 걸 어쩌겠어.


그런 형과 조금 거리를 두고 살았다. 형이 조금 불편했다. 너무 완벽해서.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이가 아니라 언제까지고 철없는 동생으로 사는 것은 때로 지치기도 하니까. 공감대를 가지기에는 형은 너무 크니까.

형은 크게 자수성가해서 업계에서는 손꼽히는 일인자가 되었고 돈도 어마어마하게 벌었다. 재작년 은퇴를 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는 말을 들었다.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형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역시 형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큰 그릇이어서 그전에도 그랬지만 더더더더 굉장한 이야기를 했다. 말을 듣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하고 끽소리도 못했다. 어디 어디에 산을 사서 어쩌고 저쩌고 생태 프로젝트를 어쩌고 어쩌고 기후에 맞는 나무를 어쩌고 저쩌고... 거의 왕국을 하나 건설하는 듯한 스케일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 주군은 믿고 따르는 대상이다. 공감대는 무슨... 감히 상상도 못 하는 세상을 내다보고 꿈꾸고 설계해서 나아가는 사람이 주군이다. 그리고 형은 역시 나의 주군다웠다. 왜 나는 형을 잊고, 어디 주군 없나를 찾아다닌 걸까.

그런데 나는 진짜 주군을 따를 수 있을까? 음... 어쨌든 나의 주군 타령이 조만간 끝날 것은 확실하다.



사진출처 https://pixabay.com/photos/mentor-teacher-learning-fishing-3563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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