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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Aug 12. 2021

호캉스의 끝


친구 덕에 팔자에 없는 호캉스를 했다. ‘팔자에 없는’이라는 말은 ‘평소에 해보지 못한’ 또는 ‘분수에 맞지 않는’이라는 의미가 포함되는 말이다. 여행이라 함은 자고로 사람 사는 곳에 들어가 서로 부대끼는 것이지 휴식을 위한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호캉스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가 나랑 호캉스 갈래? 내가 쏠게, 하는데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좋아! 하고 답했다. 시골집 툇마루에 앉아 처마로 떨어지는 빗방울 보는 것도 좋고 궁뎅이가 익을 만큼 뜨겁게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도 좋지만, 쾌적한 호텔 방 침대에 뒹굴뒹굴거리는 게 제일 좋은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친구가 쏜다니, 백수는 역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작년 여름, 장마는 길고 날은 덥고 습도는 높아가면서 나의 인내도 한계에 다다랐을 때, 머릿속에 반짝, 하고 호텔 수영장이 떠올랐다. 호텔이라고 장마에 비가 안 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호텔 수영장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영장에서 배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다. 파란 수영장 천장이라도 좋았다. 그렇게 한번 떠오른 수영장에 대한 로망은 사라지지 않고 수시로 고개를 내밀었다. 바다파와 계곡파가 있다면 당연히 계곡파였던 내가 바다에 떠있는 나를 자꾸 떠올렸다. 금세 호텔 수영장으로 화면은 바뀌었지만 어쨌든 물 위에 떠있는 내 모습이 자꾸만 재생되었다.

드디어 그 기회가 온 것이다. 호텔 수영장에서 하늘을 보는 나의 로망을 풀 기회 말이다.

친구는 산책로가 있는 호텔이면 좋겠다면서 내게 검색해볼 것을 권했는데 나는 수영장이 있으면서 산책로가 있는 호텔을 검색했다. 그리고 어언 10여 년(어쩌면 20여 년일지도?) 장롱 깊이 처박아두었던 수영복을 유물 발굴하듯이 꺼내 들었다. 아싸! 나 수영장 간다, 하면서.    

  

우리는 1박이지만 알차게 꽉 채워 보낼 생각에 3시 체크인 시간보다 조금 앞서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하자마자 나는 바로 수영장으로 튀어갈 생각이었다. 다행히 체크인은 받아주었다. 그런데, 수영장이 오늘, 휴관, 이라는 것이다. 뭣이라고? 휴관이라니! 그런 말 없었잖아요?라고 항의했지만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써진 월 2회 휴관에 대한 안내를 콕 집어 보여주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래, 내일 아침에 가면 되지. 아쉬웠지만 쿨하게 돌아섰다. 괜히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방으로 올라가 대충 짐을 던져놓고 일단 침대로 다이빙을 했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일도 그렇게 누워서 볼 하늘을 상상했다. 요즘 하늘이 유독 파랗고 구름은 그림 같지만 오늘은 더욱 맑아 보였다. 와, 정말 유화 같지 않니? 그래. 너무 좋다, 우리는 늘어졌다. 가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보내본 것이 얼마만이냐. 핸드폰을 보지 않고 오로지 친구의 말에만 귀 기울여 본 게 얼마만이냐. 우리는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고 하룻밤을 보냈다.     

 

집에서는 그렇게도 짜증 나던 햇볕이 오늘은 새소리와 함께 상쾌한 아침을 열어주었다. 일어나자마자 무슨 밥을 먹냐던 식습관은 집에 두고 왔으므로, 우리는 신나게 호텔 조식을 먹으러 갔다. 예상보다 훨씬 잘 차려진 조식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욕심껏 먹어댔다. 이제 수영장에 가야 하는데 너무 배가 불렀다. 이대로 수영장에 갔다가는 배가 아플 것 같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여름에도 따뜻한 물을 마셔야 하고 뭔가를 먹었다 하면 앉아서 쉬어야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배부른 상태로 찬물에 들어갔다가는 분명 탈이 날 게 뻔했다.

얼른 방에 와서 이불을 덮고 누웠다. 가장 소화가 잘되는 자세로 상체는 조금 올리고 배는 따뜻하게 하고 약간 오른쪽으로 돌아누웠다. 최대한 편안하게, 최대한 오래 누워 있다가 수영장으로 향했다.    

  

드디어, 내 눈앞에 수영장, 호텔 수영장, 파란색의 호텔 수영장, 하늘이 보이는 파란색의 호텔 수영장이 펼쳐졌다.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하늘이 보이고 수영장의 천정은 파란색이었다. 네 개의 레인이 뻗어있고 한쪽에는 영유아들이 놀 수 있는 낮은 풀과 수중 1미터짜리 풀이 있었다.

나는 당당한 걸음으로 수중 1미터짜리 풀로 갔다. 그렇다. 나는 수영을 못한다. 배영은커녕 개구리헤엄도 칠 줄 모른다. 수영을 배우려고 스포츠센터에 등록한 적은 있다. 발차기를 하고 음파를 했지만 영 재주가 없었다. 한 달도 못되어 그만두었던 것 같다. 몹시 춥고 시끄럽고 힘들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다행히 이곳은 따뜻했다. 물 바깥 온도도 따뜻했고 물속도 차갑지 않았다. 어린아이 몇 명이 첨벙거리고 부모들이 그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시끄럽지도 않았다.

나는 만족스러웠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벽을 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왕이면 커다란 튜브가 있어서 나를 떠받쳐주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내손으로 벽을 붙들고 있는 게 더 안심이 됐으니 이걸로 충분하다. 머리를 다 담그지는 못해도 물속도 한참 들여다봤다. 선베드에도 잠시 누웠다. 그거면 됐다.

     

기분 좋게 수영을 마치고(!)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배가 아팠다. 허리도 끊어지게 아프고 어깨며 팔도 쑤셨다.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내며 침대에 널브러졌다.

친구는 놀라서 괜찮냐고 묻고는 체크아웃을 조금 늦춰달라고 호텔에 요청했다. 그리고 타박을 했다. 밥 먹고 바로 가서 그런가 보다, 역시 어제 했어야 했다, 로망 실현했으니 이제 다시는 호텔 수영장 말도 꺼내지 마라 등등.

말할 기운이 없어서 가만히 있었지만 사실 밥 먹은 거랑 상관없었다. 그제야 기억이 났는데 어릴 때도 그랬다. 딱 한번 해수욕을 한 적이 있는데 그날 밤 배가 아파서 온 식구가 잠을 못 자도록 괴롭혔다. 왜 수영을 그만두었는지도 기억이 났다.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라 배가 아파서 그만뒀었다. 물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내게는 무리였다. 차갑지 않았어도 마찬가지다. 어제 했으면 여행을 망쳤을 테니 오늘 하기를 잘했다. 그리고 로망은 이렇게 실현하는 것이다. 대가를 치르면서.     

 

달리기를 하고 싶어 하는 후배가 있었다. 그런데 달리고 나면 무릎이 아파서 한동안 병원에 다녀야 했다. 너무 달리고 싶은데 한 번 달리고 나면 한 달 병원에 다녀야 하니 어쩌면 좋으냐고 했다. 다행히 병원에 다니고 나면 무릎은 낫는다고 했다. 그럼 달리는 거지. 좋아하는 것을 몸이 받아주지 못하는 것이 슬프기는 하지만 다시 달릴 수 있는 거잖아. 그럼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밖에. 후배는 달리고 병원에 다니는 것을 선택했다.      

후배에 비해서 나의 대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체크아웃을 하고 친구의 차에서 10분 정도 누워 있을 동안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며 마치 10년은 늙은 것처럼 피로했지만 다시 10분 정도 지나자 눈꺼풀이 들리며 몸을 휘감았던 피로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아마 햇볕에 달궈진 차에 몸이 덥혀지면서 괜찮아진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어쨌든 그 정도면 로망을 실현하기에 나쁘지 않은 대가가 아닌가. 시간으로 따지면 물속에 있었던 것은 기껏 15분 정도였고, 세 배 넘는 시간 동안 힘들어했지만 그동안 나는 행복했고 그전부터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로망 실현이라는 만족감까지 얻었다.     

 

호텔에 들어서면서, 수영장에 들어서면서 열체크를 하고 정상입니다, 라는 확인을 받았다. 그 말을 들으면서 특별히 안도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상을 체크하면서 정상인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정상 속에 살아왔는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당연히 걸을 수 있고 당연히 말할 수 있고 당연히 뛸 수도 있으니(요건 이제 쪼금 힘들어졌다...) 아주 조금의 대가를 치르는 것 정도는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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