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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Aug 18. 2021

망상과 상상 사이

나, 돌아갈래

전철에서 아이를 봤다. 옆에 있는 엄마는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에게 보채지도 않고 엄마의 가방끈을 가지고 놀았다. 혹시, 아이가 방치당하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데 아직 기저귀를 하고 있었고 여름이긴 하지만 내의 바람이었다. 


아이는 엄마 옆구리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하고선 가방끈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했다. 그러다 얼핏 창문으로 눈이 향하나 싶더니 마치 처음 보는 듯이 창문을 내다봤다. 전철은 아직 지하를 달리고 있었으니 창문은 컴컴한 어둠뿐이었다. 아이는 가방끈을 내려놓고 아예 뒤돌아 앉았다. 아이가 창문을 향해 있기는 하지만 무엇을 볼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이 뒤통수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분명 멍한 눈빛을 하고 있을 거라 짐작되었다.

전철이 정거장에 잠시 서고 풍경이 달라져서일까, 아이가 갑자기 앞쪽 의자로 와서 창문에 매달렸다. 마침 전철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빈 의자가 많았다. 엄마는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더니 다시 핸드폰에 고개를 박았다. 전철이 움직이면서 다시 창문이 컴컴해지자 아이는 엄마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렇게 두어 번 반복했나, 엄마가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얼른 제자리로 와서 앉았고 엄마의 가방끈을 다시 잡았다. 


엄마는 핸드폰으로 뭘 그리 보는 걸까. 뭔가 급박한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이해해보려 했지만 핸드폰을 향한 엄마의 표정은 너무 시큰둥하고 갈 곳 잃은 손놀림이었다. 독박 육아를 하다 보면 아이 말이 아닌 제대로 된 말을, 아이가 아닌 '사람'과 사람다운 대화를 하고 싶어 진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엄마의 얼굴에 묻은 권태를 보며 짠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아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아이가 용수철처럼 제자리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니 일면식도 없는 낯선 여자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게 된다. 


아이는 가방에 또 고개를 처박고 있다. 몸을 가방에 맡긴 채 가방끈을 손가락으로 말았다가 다시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빤히 보다가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한다. 처음에는 보일락 말락 하는 작은 동작으로 손가락만 까딱이다가 팔 전체가 움직인다. 아이 입모양이 아기새처럼 커졌다 작아진다. 

아! 저게 뭔지 안다. 아이는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 세상 말이다. 눈과 입이 달싹달싹하면서 아이만의 이야기를 눈앞에 만들어내면서 놀고 있다. 아이는 멍한 눈도 아니고, 심심하지도 않다. 아이는 엄마의 눈길을 떠나 혼자 노느라 여념이 없다. 엄마가 핸드폰을 하든 뭘 하든 엄마와 함께하고 있으니 걱정이 없고, 엄마가 시큰둥하든 말든 상상의 세계는 언제나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자유롭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릴 때 엄마랑 버스를 타면 혼자 공상에 빠졌다. 뭔가를 쫑알거리기도 하고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기도 하고 크게 한숨을 쉬기도 해서 쪼끄만 애가 왜 한숨을 쉬냐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때 나는 진짜 한숨을 쉬었다. 한숨을 쉰 게 아니라 큰 숨을 쉰 거라고 말해봤자 소용없어서.  

지금도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몇 뼘이나 되는지 손으로 재어보고 산과 나와 거리를 감각해보곤 했다. 버스는 달리지만 산은 제자리인 건 산이 흐르는 시간과 버스가 흐르는 시간이 달라서인가 궁금해했다. 지금 생각하면 과학적인 것과 수학적인 것들로 연결시킬 수 있는 궁금증인데 사실 그에 대한 답이 궁금한 적은 없었다.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는 게 재미있었다. 

조금 더 커서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버스 운전사 아저씨의 등짝만으로도 아저씨 얼굴과 말소리와 웃음소리 같은 걸 만들어내고 아저씨와 이야기했다. 등짝은 그대로 인데 팔다리가 알아서 운전하는 동작을 따라 해 보면서 아저씨와 친해지기도 했다. 내 앞에 앉아 졸고 있는 아줌마에게 코 고는 소리를 만들어 붙였고 버스가 흔들리는 움직임에 따라 고개를 처박을 땐 그에 맞는 노래도 불러줬다. 아줌마네 집에서 기다릴 누군가를 떠올리곤 내가 그 누군가가 되어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아줌마가 벌떡 일어나 내리면 아줌마네 집이 저기란 말이지, 하며 내만의 상상을 구체화했던 것 같다. 나중엔 그게 진짠지 가짠지도 헷갈려서 마치 아줌마한테 들은 이야기인 것처럼 언니에게 떠벌릴 때도 있었다.       

한창 상상 속에 빠져있을 땐 엄마가 내리자, 하면 그게 그렇게 아쉬웠다. 엄마 손에 이끌려 버스에서 내리기는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버스 안에 있어서 미련이 많았다. 그렇게 나는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서 미련을 부렸던 아이였다. 


아이는 엄마의 가방끈만으로도 충분히 혼자 놀 수 있고 캄캄한 창문을 내다보며 온갖 세상을 끌어올 수 있다. 손가락을 눈에 대고 뭔가를 보고 있는 아이는 지금 충분히 편안할 수 있다. 자신만의 세상에서 마음껏 유영하며 어린아이만이 누릴 수 있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엄마도 아이는 아이대로 편안하게 두고, 자신도 잠시 자신의 시간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어른이 항상 놀아주어야 하고, 보살피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돌봄 강박이 제일 싫었었는데. 그런 강박이 아이와 놀아주지 못하면 스마트폰이라도 쥐어주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스마트폰을 쥐어주는 것이 오히려 방치하는 것인데.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는 한없이 편안해 보였고 늦게까지 기저귀를 떼지 않아도 다그치지 않는 선량한 엄마로 보였다. 어이가 없네, 는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관계없는 내가 보이는 것만 가지고 함부로 판단하고 이러쿵저러쿵 시시비비를 만들어내더니 이제는 또 선량이라니. 

그 아이와 엄마를 지켜본 시간은 기껏 전철 몇 정거장을 지나치는 동안일 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겉으로 보이는 몇 가지 단서만으로 아이를 방치한 부모로 낙인찍었다가 다시 아이를 편하게 키우는 선량한 엄마로 둔갑시켜버렸다. 

지나친 관심은 아이가 혼자 놀 수 있는 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힘, 혼자 상상하는 즐거움을 앗아가기도 하고, 왜곡된 시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시 자유롭게 상상을 즐기던 아이 시절의 열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진출처 여자 달 우주 - Pixabay의 무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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