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1학년

갱년기는 예술이야

by 천둥

세계적 골퍼 박세리는 이제 스포츠 선수들의 언니를 넘어서 우리들의 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세리 언니(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그토록 멋진데)가 얼마 전 한 방송에서 슬럼프를 낚시로 이겨냈다고 했다. 슬럼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일정 정도 보내야 하는데,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낚시는 가만히 앉아 고기가 미끼를 물기를 기다리는 일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 멍을 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기도 하다. 무언가를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보자면 낚시만 한 것이 없겠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기를 바란다. 무언가를 해야만 사는 보람을 느낀다.



무언가 시작하더라도 에너지가 적어진 만큼 모든 것을 가볍게 줄여야 한다. 가진 것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거다. 먹는 것도 줄이고 몸무게도 줄이고 일도 줄인다. 적게 벌고 적게 쓴다. 책 욕심이 많았는데 가진 것을 모두 정리했다. 새로운 책을 사서 읽고 나면 바로바로 기증하고 묵히지 않는다. 사람을 만나느라 소모하던 감정도 덜어내기 위해 가급적 밖으로 나갈 일을 줄인다. 계속 이렇게 살자는 게 아니라 갱년기를 보내는 동안만이라도 잠시 죽은 듯이 지내자는 거다. 갱년기는 다시 갱(更), 다시 살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다. 다시 시작되는 생을 위해 본연의 나, 잠재된 내가 고개를 내밀기를 기다린다.

갱년기를 지내고 다시 삶이 시작된다고 해도 어쨌든 우리의 몸은 내 맘 같지 않다. 어눌한 몸보다 깊어진 마음을 쓰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도 6학년 7학년 언니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갱년기를 지나고 나면 다시 1학년이 된 것 같다고 한다. 내 몸과 마음에 적응이 되면서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해지는 모양이다.



<윤 식당>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4차 혁명 시대에는 인간들이 저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스마트한 세상에서 인간이 할 일이란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인연을 만들고 기꺼이 노동을 즐기는 것이어야 한다. 예능이니까 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치부하지 말고 더 많이 상상하고 더 적극적으로 적용해봐야 한다. 로봇과 컴퓨터가 다 해주는 세상이 되면 편리하고 이로운 점도 많겠지만 따뜻한 온기를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 가끔 윤 식당이나 윤스테이같은 정성스러운 환대가 여기저기서 일어난다면... 물론 기본소득이 보장되어 유희만으로도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겠지만 실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 아닌가. <어쩌다 사장>처럼 어쩌다 서점, 어쩌다 티브이, 어쩌다 공연, 어쩌다 대화 등 다양하게 변주하면 좋겠다.



우선 노인들이 먼저 실험적인 삶을 살아보는 건 어떨까. 노인들에게는 오랜만에 다양한 솜씨를 뽐내보는 기회가 될 것이고 키오스크가 지겨운 세대에게는 친근하고 다정한 사람의 손길을 느껴보는 환대의 장이 될 것이다.

천만 노인시대를 앞두고 다양한 정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 노인을 대상화하고 혜택을 주는 방식이다. 노인이 주체가 되어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그 혜택이 다른 세대에게도 나눠지면 안 될까? 노인도 자기 효능감과 사회에 대한 공헌감을 느끼고 싶다.

먹고살기도 막막한 노인과 취약계층이 수두룩한데 무슨 한가한 소리냐고? 그러니까 더욱 이런 상상력이 필요한 거다. 노인에게는 고정적인 일자리도 필요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몸상태가 좋을 때 일할 자유도 필요하다. 나이 들수록 놀이처럼 일해야 한다. 스스로 기획하면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껴야 한다.


사실은 놀이고 뭐고 갱년기에는 무언가를 도모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전 세계적으로 K드라마가 유행을 하고 K좀비물이 인기몰이를 한다지만, 그런가 보다 싶고 심드렁하다. 에너지가 없으니 무언가에 환호하는 일도 감정 소모가 되어 바로 타격이 온다. 변화와 혁신에 대한 의지도 사라졌다. 어떤 의미로는 편안하다. 예전에 한의사 선생님이 음악도 격정적인 거 말고 봄바람 살랑이는 듯한 음악만 듣고, 그마저 자주 듣지 말고 가끔 들으라고 했던 것을 이제는 온몸으로 이해한다. 마음에 파장이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기쁨조차도 부대끼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다시 내 안으로, 고독 속으로 들어간다. 갱년기의 고독은 침잠해 들어갈수록 오히려 나를 떠받쳐 오르게 한다. 고독 속에서 내 몸과 내 정신은 스스로에 걸맞은 속도와 에너지를 찾아 재정비하고 삶을 재구축한다. 불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애통해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물러날 줄 알게 되고 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감사와 기쁨으로 맞이한다.



충분히 고독 속에 나를 내어주고 몰입하다 보면 발끝에 힘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빈 쭉정이만 가득한 들판에 선 줄 알았는데 얼핏 꽃이 보인다. 하도 작아 눈에 띄지도 않았는데 온통 꽃이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꽃인 걸 알 수 있다. 코를 대고 꽃향기를 킁킁 맡아야 향기롭다는 걸 알 수 있다. 가만히 앉아 꽃들을 본다. 꽃이 메마른 얼굴에 웃음을 피운다. 웃는 내가 낯설어 고개를 숙인다. 내 발이 꽃을 밟고 있다. 뒤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걸음걸음마다 꽃이 스러져있다. 아, 내가 꽃길만 걸어왔구나. 앞에 놓인 길도 그렇게 꽃길이구나. 작지만 분명 꽃이고 울퉁불퉁하지만 분명 꽃길이구나.



조금씩 갱년기의 터널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노년이 코앞이라고 했는데 아직 중년인 것을 알게 된다. 막막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창창하다. 창창한 것이 마냥 좋지는 않다. 그래도 창창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니 그 말이 푸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책상 앞을 벗어나 문을 열고 나가볼까 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러다가도 금세 주춤한다. 활력을 채우고 제2의 인생을 펼쳐야 한다는 말들의 홍수에 다시 주저앉는다. 기나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벌써 지친다. 다시 문을 닫아걸고 싶다. 이렇게 지친 마음으로 굳이 살아가야 하나. 어차피 죽으면 무로 돌아가는 것을. 아무 의미 없다.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죽음 앞에서 아무 의미 없다고 여겨지는 판에 기를 쓰고 무언가를 하려는 스스로가 우습다. 그렇게 죽음, 또는 마지막을 직면해버리기도 한다, 갱년기는.



스무 살엔 사랑을, 서른 살엔 성장을, 마흔 살엔 청소년들과 씨름하느라 나 아닌 내가 여기 텅 비어 서있다. 더 잘하려고, 더 잘살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나를 깎고 잘라내기만 했다. 그 뾰족한 것은 때로 성과가 있어 세상에 빛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새 그 뾰족한 것이 빛을 잃고 무뎌져 버리니 허망한 것이다. 게다가 하도 깎아내어서 내가 남아나지 않은 것 같다. 때로 낯설기까지 한 나, 작아진 나, 알맹이만 남은 나다. 나를 보호할 어떤 것도 없이 알맹이만 남아있어 내가 보기에도 민망하지만 진짜 본모습의 내가 지금 여기 있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알던 바로 그 나다.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가장 근본으로 돌아가 있다. 가장 나다운 내가 눈앞에 서 있다. 멈춰서 찬찬히 다시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가 이렇게 태어난 이유, 내가 나인 이유가 빤히, 환히, 감사하게, 보인다.

존재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여겨봤자 존재 자체는 팩트다. 의미는 내가 만든다.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게 된다. 가식 없이 느끼는 대로 남들 신경 쓰지 않고 말하고 행동해버린다. 느끼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고 사소한 것 하나도 넘어가지 않고 아껴준다. 순식간에 180도 다른 내가 된다. 조금 전의 허무주의-아무 의미 없고 무로 돌아갈 뿐이라던-가 어디로 가고 용감해진다. 내가 웃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의미 있다. 젊은 시절 담고자 애썼던 의미와는 다른 의미다. 물론 나이가 들었다고 절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껏 알맹이를 갈고닦아 벼려진 감각 덕분이다. 죽음을 빤히 바라보며 살 수 있는 나, 그런 나 자신이 존재 자체로 여기, 있다.



글로 썼기 때문이다. 글 안에서 나는 내가 나이려고 발버둥 쳤기 때문이다. 무엇을 쓸까, 왜 쓰는가, 어떻게 쓸까를 떠올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것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까 무엇을 할까로 이어졌고, 나라는 사람을 훤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글은 자신의 삶을 제시한다. 글은 생각지 못한 결심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전환적 글쓰기’다. 또한 글은 사적인 경험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내 준다.



그래서 좀 더 글로 써보려 한다. 내 삶을 예견하기 위해. 갱년기의 공적 기록을 위해. 앞으로도 글을 쓸 것이다.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통해 나를 위한 삶을 사는 행복을 누릴 것이다. 고독을 통해 진정한 독립을 할 것이다. 독립적인 사람만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에서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라고 말했다. 자기 변화를 위해 유연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친절을 감사히 받고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공헌의 기쁨을 맛볼 것이다. 나를 잘 돌볼 것이다. 내 감정을 존중하고 내 감성을 소중히 여기고 더 내 몸을 아낄 것이다. 많이 걸을 것이다. 깊이 호흡할 것이다. 언젠가 나도 6학년 언니들처럼 그 나이가 되면 지금보다 단단해질 것이다. 갱년기를 잘 보내고 자신을 잘 돌보는 중년을 살면 분명 그리될 것이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 것이다. 언젠가 “내 멋대로 잘 살았다!”라고 묘비명을 쓸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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