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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r 15. 2022

사이좋게 지내렴이라니

드라마 <스물다섯스물하나>를 보다가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스물다섯스물하나>, 2521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남들도 다 하는, 재밌는 거 다 아는, 가슴이 콩닥콩닥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물론 나도 가슴이 콩닥콩닥해서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고 9시 10분에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리모컨을 붙들고 티브이 앞에 정자세로 앉아있다. 그렇다고 글로 쓸 만큼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떠오르거나 달콤한 청춘이 부럽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 갱년기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글을 쓰려는 건 희도 엄마 때문이다. 그동안 희도 엄마는 참 미운 캐릭터였다. 희도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살갑게 대하지도 않는다. 희도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 아빠를 제일 잘 아는 두 사람인데 아빠 얘기를 나누지도 않는다. 시청자로서뿐 아니라 아이를 키워본 엄마로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약한 사람이다. 심지어 나이 들어 손녀에게 따뜻하게 대하는 것마저 얄미울 정도로. 그런데 지난주 그 희도 엄마가 안쓰러운 장면이 나왔다.  

희도와 이진이 희도의 집에 있었다. 이진의 회사 선배이자 방송사 앵커인 희도의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고, 이진에게 기자로서 취재원과의 거리를 두라고 조언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희도는 일 얘기뿐이냐며 엄마로서 할 말은 없냐고 투덜댄다. 엄마는 "사이좋게 지내렴" 한다.


 "사이좋게 지내렴"이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뒤집어지게 웃었고 오래 마음 아팠다. 세상 어설프고 서툰 엄마라는 존재가 너무 안쓰러워서.  

희도 엄마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서툰 사람이었다. 하지만 계속 서툰 것은 나쁜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누구나 처음에는 서툴 수 있다. 아무리 서툰 것도 조금씩 노력하고 배워가면서 익숙해져 간다.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사람도 느리고 아직 서툰 것을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차차 나아진다. 그런데 희도 엄마는 미안해하지 않고 당당하다. 어린 손녀 앞에서도 이해받지 못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나빴다는 것을 여전히 모른다.


나도 물론 서툰 엄마였고 나쁜 엄마였다. 때로 지금도 여전히 서툴고 나쁘다. 가끔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바로 어제도 그랬다. 어제 둘째가 입대했다. 아이와 논산 육군훈련소에 가면서 아무 말도 못 했고, 오면서 아차, 할머니랑 통화하는 거 잊었네, 아차 귀 파주는 거 잊었(나의 소소한 취미생활이다), 후회했다. 친구가 위로한답시고 요새는 홈피에 사진도 자주 올려준대, 그러는데, 나는 처음 듣는 소리다. 홈피가 있다니. 얼른 홈피에 들어가 봤다. 역시 온갖 안내가 다 있었다. 내 자녀 찾기라는 카테고리도 있었다. 아직 우리 아이는 등록 전이어서 찾을 수 없지만 소속을 정확히 알 수 있다니 비로소 정체가 분명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입대 전날 한창 짐을 싸는 아이에게 군대 가면 다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제 형이 내게 지청구를 주었다. 피부관리를 위해 선크림도 가져가야 하고 딱딱한 군화를 좀 편하게 신으려면 깔창도 있는 것이 좋다고. 이미 한번 겪은 일인데도 이토록 서툴다. 하긴 군대 갈 만큼 키웠으면 알아서 할 일이긴 하다. 다만 내 마음 챙기는 것조차 서툰 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내가 서툴렀던 것, 나빴던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희도 엄마를 보며 더 오래 마음 아팠던 것 같다. 서툰 엄마였던 어린 나를 떠올리며, 여전히 나쁘기도 한 지금의 나를 떠올리며, 그리고 지금 현재 서툴고 힘들 수많은 엄마들을 떠올리며 마음 아프다.

작가는 영원한 건 없다는 걸 강조하듯이 희도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해 여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을 굳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영원할 것 같다고, 영원하자고 말했지만 영원은커녕 몇십 년도 못 간다. 그토록 아련하게 빛나는 순간들은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서툴고 나빴던 엄마만 기억하며 평생을 미워한다.  

나도 오래 엄마를 미워했다. 세상의 많은 딸들처럼 서툰 엄마가 평생토록 미웠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어서 그런 것도 잘 알고 엄마도 힘겨운 시절을 보내면서 부족했던 엄마 노릇을 후회하고 아쉬워했으리라는 걸 잘 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본 이상 그걸 모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 평생의 핑계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못난 마음을 이 나이 먹도록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아들이 내게 그런 것처럼.

왜 우리는 서툰 엄마가 대물림되도록 그대로 둘까. 왜 아무도 엄마가 어떤 거라는 걸 가르쳐주지 않을까. 왜 제도는 여전히 서툰 엄마를 양산하면서도 좀처럼 바꿀 생각도 하지 않을까. 왜 서툰 엄마가 되느니 차라리 엄마가 되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걸까.

 

무엇보다, 왜 엄마만 서툰 것이 나쁜 걸까. 왜 아빠는 서툴러도 용서되고 용인되는 걸까. 아니 사실 아이들로부터 용서되지는 않는다. 엄마를 미워하다가 그런 엄마를 그대로 지켜보는 아빠를 미워한다. 아빠의 역할은 그것이라는 듯이. 아마 아빠는 절대 모를 것이다. 엄마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지만 아빠들은 그것이 당신들의 몫인 줄도 모르고 산다. 그나마 요즘 아빠들은 자식이 어떻게 컸는지도 모르고 살았으면서 손주 키우면서 그 재미를 누린다. 손주는 책임이 없으니까. 키우는 공도 없지만 부모 같은 책임은 절대 아니니까. 손주도 부모는 미워해도 할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는다. 이쁜 것을 누리기만 하는 아빠들이 더 얄밉다. 이렇게 자식은 서툰 아빠를 끝까지 용서하고 용인하지 않는다. 아빠 본인과 사회만 용서하고 용인한다. 그런 세상이어서 안쓰럽다.


사실은 안쓰러움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서툰 나의 젊은 날들을 안쓰러워해 주려고 시작한 글이었다. 다른 데서는 전혀 서툴지 않은 어른의 모습을 하고서 아이 앞에만 서면 쩔쩔매는 희도 엄마가 안쓰럽지 않냐고 역성이라도 들어주려고 했다. 사이좋게 지내렴, 만큼 적절한 엄마 노릇이 어디 있냐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코치에게서 전해받은 메달을 창문 밖에서 밀어 넣어주면서 자신을 변명하던 그 어설픈 자세가 떠오른다. 아이들은 보지 못하지만 엄마들은 주로 그런 자세로 아이를 대하곤 한다. 엉거주춤과 부끄러움 그 사이 어드메에.

그럼에도 이 글은 안쓰러움보다 나쁜 엄마를 미워하는 쪽으로 끝내려 한다. 그건 그냥 부족한 거니까. 어른이 부족한 건 미안해해야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 나는 희도 엄마보다는 희도 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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