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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Feb 18. 2022

후각이란 무엇인가

코로나 후유증


후각을 잃었다. 코로나에 걸린 지 벌써 9개월이 되었지만 아직도 후각이 돌아오지 않았다(코로나에 걸린 사연은 코로나 치료에 대한 오해 몇 가지 (brunch.co.kr)어제 만난 지인이 코로나? (brunch.co.kr)). 후각은 단지 후각만의 문제가 아니다. 후각을 잃으면 냄새를 맡지 못할 것이고 미각에 영향을 미치겠지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후각을 잃고서야 알았다. 인간의 몸이 얼마나 유기적인데, 그걸 조각내고 분절해서 후각이니 미각이니 이름 짓고 기능을 나누었다는 것 자체에 비웃음이 나올 뿐이다.


후각은 감각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것도 마찬가지다. 후각을 잃으면서 차고 뜨거운 것에 대한 감각도 떨어졌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지만 그래도 감각이라는 것이 연결되어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생각했지만 그리움이나 애절함 같은 감정의 영역, 고독을 느끼는 정신적 영역, 영혼과 같은 내면의 영역까지 무참히 무너지게 할 줄은 몰랐다. 아니 무참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면 무참함을 '느꼈다'기보다는 '판단'한 거니까. 어느 순간 내가 즐기던 몽상과 추억과 상상을 하지 않고, 산책을 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록 무언가를 보지만 보이지 않고 어떤 것이 들리지만 들리지 않고 막연한 무엇이 느껴지지만 느끼지 않으면서 살았던 것이다!

후각과 함께 내게서 사라진 것들을 찾는 작업을 해야 했다. 부재를 알아채는 게 아니라 골똘히 들여다보고 떠올려봐야 겨우 찾아지다니.


사람의 후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기억의 감정 농도가 훨씬 높다고 한다. 후각은 미각과 함께 공감각적 세계를 만들어내 눈앞의 사물 모두를 손에 잡힐 듯 그려내게 하고 동시에 영혼의 영역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감춰진 흐린 나의 본질을 생생하게 끄집어낼 수 있게 한다.

후각을 잃었어도 예전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숨 쉬고 살지만 모든 것이 흔적만 남아있다. 이전에 힘차게 살아 움직이던, 고요하지만 집요하고 예민했던 촉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동안 촉수는 내가 진정 그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귀신같이 찾아내 주었다. 게다가 보물처럼 발견한 그것을 반짝반짝 광이 나도록 닦아내기 위해 푸르고 관념적이고 도취적인 것들을 향해 뻗어나가곤 했다. 이제 그 촉수는 흐릿하고 아득하다. 사실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까무룩하게 잊고 있었다.

후각을 잃으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감미로움이 멀어진 것도 아쉽지만 그보다 더 낙심이 되는 것은 과거를 끌어오는 통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찰나의 순간마다 과거의 추억이 동시에 어우러지게 했던 그 조화가 있었다, 우리에게. 그것이 바로 후각이었고, 후각은 그 찰나를 잡아채어 현재의 본질을 알아채게 하고 동시에 심연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현재에 발을 내딛게 해주는 망각의 힘을 발휘했다. 때로 순간적으로 영혼의 세계가 보도블록을 뚫고 튀어나오듯이 예술로 승화되어 표현되기도 했다.

후각을 잃은 감각을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탁하고 흐릿한 회색과 쨍한 원색 몇 가지가 물에 번져있는 느낌일 것이다. 다채롭다거나 심미적이라거나 하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창백한 물질이 공중에 떠있는 세상, 어슴푸레한 어둠 속이지만 혼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 사는 것이다.


지나치게 감각이 예민하던 날에는 몸이 휘지도록 힘들기도 해서 감각을 조금 죽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한 아기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아기가 태어나자마자부터 너무 울어서 검사를 해봤더니 청력이 지나치게 좋아서 아기에게는 모든 것이 괴로운 소음으로 들린다고 했다. 부모는 고민 끝에 아이의 청력을 조금 낮추는 선택을 했고, 결국 아이는 발달장애가 생겼다. 그때는 의술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청력도 후각처럼 다른 것들과 연결되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안경을 벗으면 이상하게 티브이 소리도 크게 키우는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우리는 어느 하나의 감각을 잃으면 오히려 다른 감각이 더 발달된다고 알고 있었다. 좀 더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다른 감각이 발달되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세상을 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내가 감각과 감정과 정신의 어느 면이 닫혔다고 느끼면서 회색과 원색의 혼돈을 말하면 다른 이들은 다른 감각의 발달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감각이 발달될 거라고 전혀 예상되지 않는다. 없는 감각이 어떻게 발달될 수 있겠는가. 보이지 않거나 들리지 않으면 더 예민해지는 것은 어쨌든 불안감이라든가 두려움 등의 감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지금 나는 불안과 두려움조차 내 것이 아니다.

긍정적인 감각도 없지만 부정적인 감각이 없으니 어쩌면 삶을 살기에는 편하겠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아련함과 애달픔이 오히려 간절한 것을 보면 후각이 정신의 전부를 앗아가지는 못했나 보다.


사실 후각을 잃었어도 적당히 거기에 익숙해있었고 약간은 좋아지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담배를 피워도 몰랐는데 담배 피운 사람이 저만치 앞서 간 이후에 담배 냄새를 느끼고 손을 휘젓는 정도... 그런데 백신을 맞으면서 다시 후각이 후퇴했다. 그것도 이상한 방향으로. 여전히 고기 냄새는 안 나는데 담배, 섬유유연제 , 마늘냄새는 강하게 느껴지는 식이다. 감정은... 잘 모르겠다. 이 또한 지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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