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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l 09. 2022

나의 블루스

조금 늦었지만 <우리들의 블루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이라면 덮어놓고 좋아라 했던 시절과는 달리 실망스러운 지점들이 있었다. 시작부터 그랬다. 은희와 한수 이야기에서도 지나치게 한수를 덮어놓고 이해하려는 듯했고, 은희와 미란도 예쁜 여자들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는 개운치 않았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옥동과 동석을 앞두고는 어디 두고 보자, 하는 심정으로 지켜본 것 같다. 작가 인터뷰를 우연히 보았는데, 부모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식이라면 꼭 보라는 말에 비위가 상해버렸다. 그 의도가 너무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데 도대체 작가는 어찌 알았을까. 엄마가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미친년이다. 미친 어멍이다, 라는 대사를 시작으로 글자를 모르고 제주에 살면서 한 번도 한라산을 가보지 못한,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나 행복이라는 걸 거의 누리지 못하고 살아온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동석은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건 그저 화해라는 마무리를 기다리는 시청자들을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끝나고 계속 곱씹은 장면은 세 가지다. 하나는 어릴 때 동석을 매일 때렸던 형제들이 그땐 우리가 어려서,라고 말하는 장면, 두 번째는 동석이 엄마에게 나한테 안 미안해?라고 묻자 엄마가 내가 왜 미안해?라고 답하는 장면. 세 번째는 동석이 다시 태어나면 나랑 또 엄마 아들로 태어나고 싶냐고 물었을 때, 처음에는 대답을 안 하다가 내가 누나처럼 착하고 잘하면?이라고 단서를 달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 

첫 번째 장면은 가해자는 다 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가해자는 자신이 한 짓을 잊기 위해 노력한다.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든 그럴듯하게 자기 합리화를 한다. 피해는 피해자만 기억한다. 피해자도 너무 괴로워서 때로 잊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래서 가끔은 기억 자체를 몽땅 잃어버리는 일도 있지만 그럴 때조차 몸이 기억한다. 

두 번째 장면은 엄마도 한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는 점이다. 자식에게 좀 부족했을지라도 각자의 인생을 있는 힘껏 살아왔기 때문에 자식에게 미안하기에 앞서 자신의 인생이 불쌍하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사랑을 준 부모도 자식에게는 항상 부족한 게 부모다. 그런 점이라면 부모는 언제나 자식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평생 먼저 간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옥동으로서는 죽지 않고 버젓이 잘 살아있는 동석은 참 다행스러운 자식이다.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살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야단 한 번 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남의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가. 동석은 개망나니 자식이고 옥동은 그럼에도 자식에게 큰소리 한번 안내는 인내심 많은 엄마인 것이다. 


아이를 떠올려보니 이해가 되었다. 나와 엄마가 아니라 나와 아이 말이다. 나는 아들에 대학생이 될 때까지 옷이며 신발 같은 걸 제대로 사준 적이 없다. 거의 다른 사람의 옷과 신발을 물려 입혔고 다행히 아이는 크게 불만 없이 잘 입고 신었다. 가끔 얻을 데가 없으면 사주기도 했지만 거의 매번 누군가가 주었고 물려받을 데가 있으니 참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 아들은 내게 신발을 사달라고 했다. 더 이상 물려받은 신발을 신지 않고 새 신발을 신겠다는 아들에게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동안 별 불만 없이 물려 입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했다. 그 뒤로 우리는 가족 카드를 공유하고 각자 필요한 물품을 알아서 사게 한다. 다행히 가족 모두 과소비를 하지 않고, 지출이 있을 때마다 허락을 맡기 때문에 믿고 맡긴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아들이 운동화 재테크를 하기 시작했다. 한정판을 사두었다가 되파는 거 말이다. 재테크와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성인인 아들이 알아서 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건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다. 세상은 바뀌었고 내가 모르는 앞으로의 세상에 대해 조언할 마음이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게 비싼 운동화를 보면서 아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예전에도 아들이 신발을 저렇게 좋아했을까? 만약 아들이 왜 내게 한 번도 신발을 사주지 않았어?라고 묻는다면, 그것도 자신은 살면서 그게 한이 되었다고 한다면 나는 아들에게 미안할까? 


아니, 난 미안하지 않다. 운동화든 옷이든 물려 입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아름다운 가게를 애용하고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자식이 아직 어릴 때는, 내 손으로 키울 때는 내 방식으로 사는 게 맞다. 물론 아들이 그걸 내게 서운해하거나 원망한다면 자식에게 엄마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게 키운 것이므로 그건 몹시 안타깝다. 하지만 미안해하거나 용서를 빌 마음은 전혀 없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이 그런 거라면 달라질지 몰라도 이 경우는 내 의지였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미안하지 않다. 그러나 옥동처럼 형편이 어려웠을 때는 온통 다 미안함이고 온통 다 억울함이고 온통 다 팔자려니 할 것이다. 내 인생도 불쌍하고 저 인생도 불쌍하다. 하지만 거기에 자식에게 미안함이 끼어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장면은 아들이 그만큼 크면 자식은 더 이상 자식이 아니라, 나를 맞먹는 성인 남자로 보인다는 점이다. 동석이 소리 지르고 덤빌 때 옥동은 무서웠을 것이다. 불편했을 것이다. 동석은 엄마 앞에서 발 동동 구르는 아이의 마음이겠지만, 옥동의 눈에는 행패 부리는 진상일 뿐이다. 자식은 여전히 받을 거 못 받았다고 따라붙지만 부모는 더 이상 줄 것도 없고 주어야 한다는 인식도 없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받을 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옥동은 받을 마음을 품지 않았으므로 남들 눈에 대단한 것이다. 그렇게 자식은 호래자식이 된다.      

이 세 가지 장면에 나와 엄마를 대입해본다. 나는 엄마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피해자이지만, 엄마는 다 잊었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엄마 인생을 살았으니 아무에게도 미안할 게 없다. 성인이 된 자식이 엄마는 버겁다. 게다가 엄마에게 쌀쌀맞게 구는 딸이 서운하다. 이렇게 나의 현재가 굉장히 쉽게 객관화되었다. 

엄마를 한 개인으로서 바라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고, 나도 수없이 그렇게 이해했다. 지금의 이 글도 그런 이해의 노력 중 하나이다. 충분히 엄마의 개인적 삶을 이해하고, 지나치게 이해해서 사랑받지 못한 어린 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새로운 지점, 엄마에게 나는 더 이상 자식이 아니라는 것, 엄마는 내게 미안할 게 없다는 것, 그리고 엄마가 자식에게 못해준 것은 이미 다 잊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엄마에게는 내가 엄마에게 못해준 것만 기억한다는 걸 간과했다는 것도.       


그렇다면 나는 엄마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 본다. 마지막 장면에서 동석은 된장찌개를 해두고 마지막 길을 떠난 엄마를 붙들고 울며 말한다. 내가 원한 건 이렇게 어멍을 안고 실컷 울고 싶었다고.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자식이 좋아하는 된장찌개를 해놓고 떠난 것에 초점을 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옥동이 아직 어린 동석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 그러니까 동이가 떠난 그 시점에서 한 발도 못 벗어났다는 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옥동은 여전히 지금의 동석이 원하는 것이 무언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자신을 한때나마 행복하게 해 주었던 자장면 사준 남편과 된장찌개를 맛있다고 했던 아들만 기억한다. 동석을 위해 된장찌개를 끓인 게 아니라 자신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친절한 동석을 기대하며 끓인 된장찌개라는 말이다. 인간이란 그렇게 자기중심적이다. 엄마라도 해도.       


작가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해소해야 한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된장찌개를 끓이게 하고 감정을 고조시킨 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는 거다. 동석은 떠난 어멍이지만 끌어안고 울고 싶었던 그것을 기어이 했으므로, 어멍을 보낸 지 한 달밖에 안 지났지만 그렇게 툴툴 털고 일어난 것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모든 이야기의 끝이 잘 살았습니다, 또는 죽었습니다, 인 이유는 그렇게 마무리하지 않으면 그 문제가 다시 불거지기 때문이다. 만일 옥동이 계속 살고 있다면 동석은 과연 옥동의 병간호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며칠간의 마지막 여행이었으니 최선을 다해 곁에 붙어서 하고 싶었던 거 다해줄 수 있었지 그게 몇 년간 이어진다면, 몇십 년 이어진다면? 현실은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지 않고 그렇게 쉽게 화해되지 않는다. 또 다른 측면에서 이해했다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용서로 이어지고 화해되는 게 아니다. 쌍방의 문제인데 한쪽만의 이해만으로는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동석이 가신 엄마를 안고 우는 것으로 평생의 원한을 푸는 걸 보면서 어쩌면 나도 누군가와 실컷 울고 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엄마를 안고 울면 가장 좋겠지만 엄마는 내가 안고 울도록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왜 그러냐고 묻고 답하고 화낼 것이다. 동석은 아이러니하게도 엄마가 죽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저 엄마가 아닌 무엇, 예를 들면 빈 의자(상담에서 빈 의자는 자신 또는 대상이 된다)를 붙들고 울 수밖에. 그게 상담이라는 게 있는 이유가 아닐까. 여전히 부족하겠지만, 그건 죽어야 끝난다. 누구든지 간에. 죽음은 때로 모든 것을 해소한다.  

나의 블루스는 나 혼자 추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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