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0대 덕후다. 혼자 발 동동 구르며 좋아하다가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이라는 교양서를 앞세워 나의 덕질이 얼마나 삶에 있어 소중한 행위인지 한 권의 책(<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브런치북] 교양 수업으로 보는 덕질 고찰 (brunch.co.kr))으로 써낼 만큼 덕질에 열광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이제는 굳이 덕질의 이로움을 역설하는 것이 무안할 만큼 전 세대를 막론하고 덕질을 장려하는 시대로 돌입했다. 우리는 하다못해 달고나 커피라도 만들어서 각자의 방구석을 세상과 연결해내려고 애쓰지 않았는가. 더 이상 덕후는 어린 소녀 팬들을 얕잡아 부르는 빠순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과 무언가에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가진 자들을 일컫는 이름이 되었다.
페터 비에리는 “교양이란 자신에게 행하는, 그리고 자신을 위해 행하는 어떤 것”이라고 했다. “교육은 타인이 나에게 해줄 수 있지만 교양은 오직 혼자 힘으로 쌓을 수밖에 없”으며 “교육을 받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지만 교양은 “무언가가 되려는 목적, 즉 이 세상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의식을 품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과 세계를 대면하는 방식”은 교양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이다.
나는 덕후야말로 교양인의 특성을 모두 갖춘 호모 루덴스라고 본다. 덕질은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호모 루덴스로서 자유롭게 노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그 어떤 다른 목적을 가지지 못한다. 덕질은 지극히 인간 본성에 의한 것이며, 동시에 자기 자신과 세계를 대면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고증된 사실이다. 태종은 사냥 마니아였고 숙종은 그림수집가, 헌종은 인장을 수집하고 직접 만들었으며 고종과 순종은 당구광이었다. 구중궁궐 온갖 제약이 심했던 조선왕실에서 덕질이 아니었다면 무엇으로 자신을 지키며 존재를 굳건히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놀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의례의 경계를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간은 고난에 임할 때 더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덕질을 하게 된다. 서머셋 몸은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진다는 것은 인생에서 오는 모든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피난처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다. 책만이 아니라 모든 덕질이 그러하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 시절 혹독한 세월을 차로 이겨냈다고 한다. 해남의 초의스님에게 보낸 편지기록이 남아있는데, 현판의 글씨를 보낼 테니 서둘러 차를 보내달라고 재촉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자신의 명품글씨를 앞세워 차를 달라니, 영락없는 덕후의 귀여움 아닌가. 요즘처럼 택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인편밖에 없던 그 시절에 좋아하는 차를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글씨를 써서 보내는 적극성이라니 어지간한 차 덕후가 아닐 수 없다. 주변에도 얼마나 적극적으로 영업(!)을 했는지 추사 덕분에 초의차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졌고 이후 한국 차의 부흥기가 왔다고 한다. 차 덕후로서 최고의 덕질 여건을 형성한 것이다.
추사의 덕질은 차 이전에 금석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추사체로만 기억하지만, 추사 스스로 금석벽이 있다고 자랑스러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무언가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이에게 '벽(癖)', '광(狂)', '치(痴)' 등을 붙여 '병든', '미친', '어리석은' 이라는 의미를 담아 낮춰 불렀다. 하지만 추사의 금석벽은 무려 진흥왕 순수비를 최초로 밝혀낸 수준이다. 그 뿐이랴. 잃어버린 문무왕의 비석을 발굴하고 비문을 해석하며 연구했다. 이 정도면 덕질은 벽이니 치니 광이 아니라, 하나의 일가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장착해야 할 덕목이 아닐까. 교양인이 가져야 할 품성으로 모자람이 없다. 교양인보다 성공한 덕질 인생으로서 추사가 부럽다.
추사가 개인적으로 성공한 덕후라면, 팬덤을 이뤄 성공한 덕후들도 있다. 고주몽이나 왕건을 따르던 덕후들 말이다. 혼란의 시기에 누가 이 지옥 같은 삶에서 구제해줄 것인지 그들은 대번에 알아보았다. 물론 고주몽과 왕건이 활을 잘 쏘고 전쟁터에서 수많은 공을 세우기도 했겠지만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의 한결같은 추앙이 없었다면 과연 나라를 세우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팬덤 정치는 비단 최근의 일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어 온 인류의 생존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정덕(정치덕후)의 후예라는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선덕여왕은 엄청난 팬덤을 가지고 있었을 거다. 당시에는 남녀차별이 없었다고 하나 처음으로 여성이 왕이 되기까지에는 선덕을 따르는 팬덤이 어마어마했을 것이고, 화백의 귀족들에게도 그만한 매력을 어필했을 것이다.
정치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덕질은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농민의 난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날 무렵 홍길동전이 탄생하지 않았는가. 당시 홍길동전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음 작품을 기다렸을지 가히 짐작도 가지 않는다. 작자 미상의 춘향전이나 심청전 등도 입에서 입으로 지금까지 전해져 오려면 수많은 덕후들이 스밍(원래는 반복해서 듣는 것을 뜻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반복해서 들려주었을 것이다)을 하고 2차 연성을 하였을 것이다. 지역마다 조금씩 내용이 다른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심지어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조차 기록 덕후들 덕분이라고 한다. 수원화성의 경우,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이 아니었다면 전쟁으로 훼손된 성곽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없었을 것이고 유네스코에 등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책에는 매일의 공사일지와 사용자재, 공사비용, 공사중 오간 공문서까지 상세하게 적혀있다고 한다. 도대체 우리 선조들은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미리 내다본 걸까, 아니면 정말 기록만이 그 모진 공사의 과정을 견딜 수 있는 힘이었을까. 이렇게 덕후의 눈에는 문화와 예술, 더 나아가 시대 양식이라는 것도 거대한 덕질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다른 동물과 남다른 점이 있다면 생존과 짝짓기를 넘어서 호기심이라는 무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생존 방식과 짝짓기 기술과 달리 이 호기심이라는 지적 양식은 개개인의 생김새만큼이나 다르고 특별하다. 각자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놀이는 때로 과학이나 철학, 예술이 되어 인류를 새로운 문명사회로 이끌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놀이는 다만 자기애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그 효용성을 다하는데, 거기서 우리는 더없는 안식을 얻는다. 당최 쓸모없어 보이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천착하며 요리조리 뜯어보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행위를 반복하는 일. 이것이 바로 덕질을 정의하는 말일 것이다. 또한 그 반복은 제자리를 맴도는 듯하지만 결국 자신을 선명하게 만들고 세계와 전면적으로 만나게 한다. 이것이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의식을 가진 교양인으로서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문학자 마리아 미첼은 “삶에 별빛을 섞으”라고 했다. 덕질은 건조한 삶에 별빛을 섞는 행위이다. 손에 닿지 않는 별빛을 향해 깡총거리고 흩어진 별가루를 찾아 모래 속을 뒤지는 어린아이처럼 우리는 열망할 것을 찾아 헤맨다. 덕질은 삶의 별빛이요, 별가루다.
때로 별은 너무 멀고 희미해서 그 빛을 잃을 때도 있다. 그렇다고 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별은 어둠 속에 ‘있다.’ 그것을 덕질이라 이름하든 열망이라 이름하든 우리 내면에는 그것이 숨어있다. 그러니 뭔가를 해야 한다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품고 있던 그것이 언젠가 빛을 낼 때 기꺼이 별빛을 쫓던 어린아이로 돌아가면 된다. 순식간에 별나라로 날아가서 예측하지 못한 세계를 만나고 또 다른 세상을 궁금해하고 환희를 느끼는 거다. 덕질의 참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환희를 느끼는 자신이 사랑스럽다는 거. 덕질은 자신을 더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게 한다.
슬프고 힘든 순간 못지않게 기쁘고 좋은 감정도 나누고 해소하는 것이 중요하다. 덕질 이야기는 감정을 안전하게 해방시키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사랑스러운 자신에 대해 실컷 말하고 자랑할 필요가 있다. 들어줄 누군가가 없다면 랜선에서라도 떠들면 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덕질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지나친 찬양은 혐오를 낳고 지나친 혐오는 돌+아이를 낳기도 한다. 수억 명이 모인 랜선이라도 다행히 이상한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끼리 어울리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은 사랑스러운 사람을 알아본다. 예쁜 거만 보고 살아도 부족한 세상, 덕후의 안목과 덕질의 순수함을 믿고 무시할 것은 깔끔하게 무시해버리자. 인류는 그렇게 정반합을 딛고 진보를 이룰 것이다. 자, 하던 대로 각자 충실히 덕질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