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이 해방되는 덕질을 위하여
상처받은 덕후들은 연락 주세요
며칠 전, <요즘 덕후의 덕질로 철학하기>를 읽고 sns에 후기를 올려준 분이 있다. 그는 ‘제법 진지한 덕후’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나처럼 죽자 사자 팬 생활을 하는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서 반가웠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잠깐의 즐거움이나 취미에 속하는 영역이지만, 본인에게는 태산과도 같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덕질을 오해하는 이들을 설득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덧붙였다.
누구나 덕질을 하는 세상인 것 같지만 여전히 덕질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누구보다 나 자신이 그 부정적 시선을 넘어서기가 힘들다. 덕질에 대해 생각을 하고(철학) 책을 내고 애쓰는 것도 결국 부정적 시선을 넘어서 보려는 안간힘이다.
한 권의 책을 내고도 모자라 수시로 덕질에 대한 이야기를 그러모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신형철 님의 <인생의 역사>에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라는 글귀를 발견한다. 또,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영국 작가 닉 혼비는 자신의 "축구(팀 아스널)에 대한 사랑이 내면의 우울을 잠시 꺼내어 바람을 쏘이게 만드는 일이었다"라는 기사를 발견하는 식이다.
국카스텐을 좋아하는 60대 덕친이 최근 놀라운 경험을 했다며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아주 재미있는 강연을 들었는데, 예전 같으면 그저 입으로 웃고 말았을 이야기에 박장대소하며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박수를 치며 호응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얌전치 못하게 내가 왜 이러지?라는 자기 검열이 시작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이런 내 모습 괜찮은데? 하면서 더 신나게 몸을 놀렸단다.
아, 이 얼마나 숭고한 덕질의 순기능인가, 나는 환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도 덕친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나는 그걸 몸의 해방이라고 부르는데, 3단계에 걸쳐서 해방이 되었다. 우선 공연을 가는 것 자체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문화활동 이건만 덕질이 되는 순간 멈칫거리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좌석을 예매했다. 스탠딩이라는 문화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공연장에 가서 스탠딩을 하기 위해 까맣게 서있는 팬들의 머리를 2층에서 내려다보며 경악(!)을 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도 다음에는 저 신세계로 가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해댔다.
그럼에도 다음 공연을 바로 스탠딩으로 가지 못했다. 일단 티켓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낯선 사람들 사이에 혼자 서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역시 락밴드의 공연을 앉아서 노래를 듣고 박수를 치는 것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겨우 스탠딩을 구해 사람들 사이로 가봤더니 나만 쭈삣쭈삣한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1단계 내 욕망 알아차리기다.
2단계는 내 모습 받아들이기인데, 남들처럼 손도 뻗고 떼창도 하는 것이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도 내 목소리를 내가 듣는 것도 어색했고 남들 눈이 신경 쓰였다. 나이가 많다는 게 이유였지만, 나이가 적었다 해도 그랬을 거다. 그러니까 남의 눈치가 아니라 내 눈치를 본 거였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족쇄 하나가 툭 끊어졌다. 그건 오로지 국카스텐 덕분이었다. 도저히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만들어주니까, 나도 모르게 광분을 하게 되었고, 정신줄을 놓으면서 자유로워졌다.
3단계는 내 모습을 가장 가까운 사람, 즉 남편에게 보여주기다. 운전 때문에 남편과 같이 가는 경우가 꽤 있었는데, 남편에게 발광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공연이 시작되면 남편을 피해 최대한 사람들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곤 했다.
3단계 해방을 어떻게 이루게 되었는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어느 날 갑자기 되었다. 자주 가서 그런 건지, 이제 남편이 편해진 건지, 해방에 대한 갈망이 커서 그런 건지. 어쨌든 보려면 보라지 하는 마음이 되어버렸다. 마음이 그러니까 몸이 해방되었고 몸이 해방되니까 마음도 더 자유로워졌다. 몸은 곧 마음이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애써 감추고 싶은 눈물이나 상처, 찌꺼기들이 있었는데 이제 감추지도 않고 툴툴 털어낼 수 있게 되었다.
덕친이 들은 강연 내용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누가 울면 울지 말라고 달래지 말고 실컷 울라고 해라, 그래야 치매에 안 걸린다. 화나면 참지 말고 소리 질러라, 이불 뒤집어쓰고. 맘껏 웃고 떠들어라, 보란 듯이. 수도 없이 들어왔던 이야기지만 이번만큼 공감된 적이 없더란다.
배우 김태희 씨를 좋아해서 서울대에 가고 교육기업을 일군 조승우 씨는 덕질하듯이 파고들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덕질은 그만큼 힘이 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성공의 이야기보다 덕질하면서 아팠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 책을 읽어준 진지한 덕후 님과 그밖에 덕질로 상처받은 수많은 분들과 벅찬 가슴을 안고 덕질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좀 더 당당해도 된다, 떳떳해도 된다 용기 내어 외쳐보고, 가끔씩 내면의 우울을 꺼내어 바람을 쐬게 하고 싶다. 그런 걸로도 덕질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