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둥 Jan 29. 2023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면체의 인간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서 “당신은 여전히 달리는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소설 <돌멩이를 치우는 마음>을 낸 것을 축하하는, 나름의 덕담이었다. 차마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반발감이 들었다. ‘여전히’라니,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데. 흥칫뿡 투덜거리다가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알아, 하는 마음까지 치달았다.


나의 반발을 전해 들은 창작 모임 사람들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 내가 좀 자신을 다그치는 면이 있지, 하고 인정하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내가 뭘? 아니, 내가 뭘 어쩌든 당신들이 뭔데 나를 규정해?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는 규정당하는 걸 유난히 싫어했다. 어린 시절 누구의 셋째로 불릴 때부터 그랬다. 조용한 애, 차가운 애, 까칠한 애라는 소리를 들을 때나 누구 엄마, 누구 아내, 주부로 불릴 때나, 작가님이라고 불릴 때마저 나는 누군가로부터 나의 정체성을 부여받고 싶지 않아 어떻게든 다른 이름을 내세웠다. 누가 누구를 안다고 함부로 무엇이라 부르냔 말이다.   

   

시간이 흐르고도 그 말이 여전히 가시를 돋우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진짜 달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년간 매일 그림을 그렸고 그림책을 독립 출간하고 6년간 4권의 책을 냈으니 달렸다고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하던 일이 아닌 것을 그만큼 해냈으면 달린 게 맞다. 그런데도 부정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측면이니까.


이주혜 작가는 “인간은 다면체여서 어느 방향에서 조명을 쏘아주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피사체가 된다”라고 했다. 성과라는 측면, 그러니까 쉬지 않고 쓰 추진해 온 측면에서 보면 분명 달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 지인과 함께 하던 시기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 되어 10년을 살았고, 다시 완전히 달라져서 글 쓰는 사람이 되었다. 글이라고는 쓸 줄 몰라 누군가에게 대신 써달라고 사정하던 사람(그 지인이 나를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이 차라리 내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되었다가 다시 글 쓰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본 나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 주로 생각만 하던 나다. 그와 헤어진 후 나는 주로 행동하는 내가 되었다가 다시 침잠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 나는 획기적으로 달라져야 했다. 그간 내가 지니고 있던 삶의 패턴을 끊어내야 했다. 사람 속에 둘러싸인 일상에서 타인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자신과의 만남 속에 빠져드는 일상을 살았다. 떠오르는 것들은 뭐든 시도하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최대한 제자리에 머물러 과거를 반추하고 해온 일들을 곱씹어 생각을 정리하며 차곡차곡 쌓았다. 그간 진짜 ‘달리는’ 삶을 사느라 따라오지 못한 영혼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주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다. 정성스럽게 나를 돌보며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요모조모 살피고 있다. 글과 그림이 출판물로 남아 엄청나게 달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마음에 여백이 남아 편안해진 상태다. 그런 내가 좋았다.


계속 쓰는 나를 보고 누군가는 “쓰고 싶은 것이 있어서 좋겠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목적이 있는 글, 목적을 향한 글쓰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뜻이다. 보는 면에 따라서 그쪽 조명이 더 밝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 쓸 말이 없어도 그저 빈 화면을 채우기만 한 적도 있다. 무엇으로라도 채우기만 하는 시간을 흘려보낸 후에야 말해보지 못한 것들이 마음에 고이게 되었다. 받아들여질 거라는 믿음이 없어서 쓰지 못한 것들이 조금씩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진짜 쓰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벼리고 나서야 지금에 이른 거다.   


버리는 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억울했던 것 같다, 달리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그간 해오던 일을 더 키워갈 수 있었고, 누가 봐도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흔에야 이룬 일을 왜 버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느냐고, 바보 같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커리어라 부르고 그것을 쉽게 버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하지만 버렸기에 글로 남길 수 있었다. 처음부터 쓸 것이라고, 그래서 책으로 남기겠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쓰는 삶을 살았는데 자연스럽게 삶의 고갱이가 남겨진 것뿐이다. 성과나 성공, 성취 등을 버리고 침잠해 온 시간을 보냈는데, 달리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반발심이 생겼나 보다. 작은 말 한마디에 자기 연민이 일렁이는 걸 보면 더 많이 잔해져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남들은 나를 달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아마 생각 속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뭔가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생각만으로. 몸으로 하지 못해 답답하고 애가 타서 주변 사람들을 닦달하고 볶아대기도 했다. 몸이 움직이는 만큼만 생각하는 그들에 비해 비대하게 생각이 많았다. 다행히 지금은 달리는 생각을 글에 담아내고 있어서 스스로 애달프지도 않고 주변을 힘들게 하지도 않는 건지 모르겠다.  


느리고 가만한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결국 달리고 있는 그것을 가만히 잠재우기로 한다. 무엇이 되기 위해 안달하지 않고 쓰는 즐거움과 보는 충만감을 만끽하기로 한다. 

새해 결심 따위 하지 않고, 기어이 한다면 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게 하고 있고 갖고 있고 생각하므로, 비우고 평온해지기로 한다.

내년에도 어쩌면 달리고 있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발끈하지 않을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명절이 두려운 이유, 전도 시어머니도 아닙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