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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r 20. 2023

이천수 아내 말고 심하은

꼰대의 티브이 보는 법

결혼 후 조금 늦게 아이가 생겼다. 살짝 불안했고 조금 부러워서 유모차를 밀고 가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요즘은 유모차가 아니라 유아차라고 바꿔 쓰는 추세다. 유모차라는 단어에 성역할 고정관념이 숨겨졌기 때문인데, 잘 알면서도 조금 생경하다는 이유로 쉽게 습관을 바꾸지 못했다. 한때 유모차에 대한 동경을 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 모델 심하은 씨가 ‘유모차’라는 가면을 쓰고 나왔다. 마침 패널로 나온 축구선수 이천수 씨가 아내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 웃음 포인트였는데, 정작 보는 나는 편히 웃을 수 없었다.

‘유모차’와 ‘꽃마차’라는 이름부터 그랬다. 짧은 스커트를 입고 발랄한 동작을 취하는 '꽃마차'와 달리 '유모차'는 긴 스커트를 입고 내내 경직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출산 후 방송출연이라는 힌트를 던져주는 이름이었고, 당연히 패널들도 아이 엄마일 거라고 추측했다.  

심하은 씨가 가면을 벗고 자기소개를 할 때도 오로지 “이천수 아내 심하은”이라고 말했다. 현직 모델이자 교수이면서 말이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얼마 전 런웨이에 선 것을 언급하자, 좋은 기회였지만 쉽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했다. 아이가 셋이기도 하고 새벽에 나가서 밤에 끝나다 보니 고민이 된다는 것이다. 패널들은 이천수 씨에게 도와주라고 성화를 했고, 거기에 심하은 씨는 “이천수 씨를 많이 찾아달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역시 내조의 여왕이라며 극찬을 했다.


어쩌면 방송에서 흔히 보는 뻔한 설정과 흐름이었다. 그런데 만일 가면 이름을 ‘유모차’가 아니라 ‘유아차’라고 썼다면 어땠을까. 누군가는 왜 유아차라고 쓰는지 설명하지 않았을까. 이미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몰랐던 사람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미를 새기지 않았을까. 그 의미를 들으면 심하은 씨도 누구의 아내로 소비되지 말자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는 어려움과 동시에 좋은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한 책임감을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세 아이의 양육은 이천수 씨의 몫이기도 하다는 말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내조니 외조니 하는 동경도 유모차에 대한 나의 동경과 함께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진행되었다면 젊은 세대들이 외면하는 방송이 아니라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방송으로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상상이라고?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 언어는 일종의 넛지와 같다.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한층 나은 선택을 한다. 넛지는 원래 '팔꿈치로 슬쩍 찌르다' '주의를 환기시키다'라는 뜻인데,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와 법률가 캐스 선스타인이 '사람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라는 뜻으로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정황이나 맥락의 설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한 바 있다.  


어쨌든 상상은 상상으로 끝나버렸지만, 이참에 성차별적 언어를 찾아보기로 했다. 모르는 것이 꽤 많았다. 유모차 말고 유아차, 학부형 말고 학부모 또는 보호자, 미혼 말고 비혼, 집사람 말고 배우자, 미숙아 말고 조산아, 맘카페 말고 육아카페, 효자상품 말고 인기상품... 머뭇거리지 않고, 단번에 바꾸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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