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덕질을 하는가 1

by 천둥
자기의 의견이나 원하는 것, 감정에 관한 것이라면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스스로를 돌보는 능력, 교양은 이러한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 29p


내 감정을 지나치지 않으며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서는 내가 왜 덕질을 하는가를 들여다보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덕질을 하면서 나는 많이 괴로워했다. 내 정체성이 덕후인 것을 받아들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왜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덕질을 하고 앉아있는가, 라는 생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여전히 나는 생산적인 일만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고, 의미 있는 일만이 만족을 주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즐거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의미가 없어도 즐길 수 있는 거라고 아무리 나를 설득해도 어느 순간 처음으로 돌아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내가 왜 덕질을 하는가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상념들에 대해 글로 써 내려갔다. 매일 떠오르는 다양한 이유들은 내 상황을 지속적으로 돌아보게 했고, 나름 정당한 명분을 갖게 해주기도 했다. 격정의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다시 읽어보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왜 이런저런 의지를 가지게 되었는지, 왜 이런저런 감정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나를 이런 의지나 감정으로 밀어붙인 것이 무엇인지, 이유를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는지를 전보다 더 깊이 숙고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핵심은 어떤 생각이나 감정, 소망이 그냥 생겨나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지게 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30p


소망이나 감정에 따르기보다 왜 그것이 생겨났는지, 나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의지가 한순간도 식은 적이 없다.

덕주의 탓도 컸다. 내 덕주가 누구인지 아직 말하지 않았던가. 내 덕주는 국카스텐이다. <복면가왕> 프로그램에서 음악대장으로 나왔을 때 덕통 사고를 당했다. 9연승의 신화를 쓰는 동안 나는 매 회 새로운 곡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무릎 꿇고 티브이 앞을 지켰다. 잘 알다시피 방송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는 납작하게 뭉개져서 들린다. 그런 음향의 한계를 뚫고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신이 있다면 이렇게 나타나겠구나, 싶었다. 그 당시에는 나뿐만이 아니라 음악대장의 노래에 뻐져버린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가히 폭발적이어서 전국투어 콘서트를 하고도 앙코르 콘서트를 또 해야 했고, 그 티켓을 구하지 못해서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그가 아직 가면을 벗기 전, 나는 이미 그의 맹신도가 되어 공연장에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었다.

덕후가 되어 팬 커뮤니티에 가입하려고 보니 내가 이미 가입된 상태였다. 알고 보니 그들이 무명을 벗어나 처음으로 공중파에 나오기 시작한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를 보던 과거의 내가 가입해놓았던 것이다.

음악대장 노래를 지겹도록(절대 지겨워지지 않았지만) 돌려 듣고는 도대체 국카스텐의 노래는 어떤가 들어보려고 찾아봤더니 회사 동료에게서 받은 국카스텐 노래 폴더가 내게 있었다! 어떻게 그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나. 심지어, 나를 괴롭히던 상사를 벗어나 퇴근하는 순간, 그 노래를 귀에 때려 넣으며 괴성을 질렀던 기억마저 떠올랐다. 지인들에게 국카스텐 음악에 대해 침 튀기며 간증을 했던 적도 있었다. 그랬다. 나는 이미 그들의 노래에 위로받은 적이 있는 한 마리 어린양이었다. 그러니까 뭔가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릴 때마다 나는 그의 노래에 기대어 내적 샤우팅을 대신해왔던 것이다.

그들의 음악성은 대표곡 <거울>만 봐도 얼마나 독특한 자기 세계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그의 가사는 매우 철학적이고 미학적이어서 예술대에서 그를 초청해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게 한 적도 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우리 덕후들이 느끼는 인간적인 매력도 끝도 없지만, 객관적으로도 그는 자기 탐색을 쉬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다. 그들이 살아온 날들을 공간으로 표현하면 학교, 연습실, 공연장, 공사판이 다라고 하니 성실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인기에 연연하여 일희일비하지 않고, 연예계에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으로 손가락에 꼽히고... 이런 덕주이니 왜 덕질을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사실 무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쉬지 않고 고민하고 분석했다. 그의 가사를 분석하고 그의 음악이 주는 상징을 찾아내고 그의 지나온 삶들을 돌아보고 그가 읽었던 책을 찾아 읽으며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했다. 어쩌면 그것이 조각난 말과 찌꺼기가 되어버릴까 봐 덕주에게 머무르지 않고 내 안 저 깊숙이 숨은 고갱이를 향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것이 덕주가 음악을 하는 진정한 이유이며, 팬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교양을 갖춘 사람은 오래전 언젠가 주워들은 조각난 말과 생각의 찌꺼기들만을 만날 되풀이하는 이들에 비해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중략)... 자아의 고갱이에 도달하는 데는 끝이라는 지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결코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28p


음악이라면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내가,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내가, 왜 가장 시끄럽다고 하는 록음악에 심취하게 되었을까. 공연은커녕 노래방도 안 가는 내가 어쩌다가 록 페스티벌까지 찾아가는 걸까. 내게 언제부터 록의 DNA가 있었던 걸까. 과연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덕주 개인을 좋아하는 걸까. 내가 그를 좋아한다면 왜 하필 그일까. 그의 모습에서 나는 무엇을 느낀 걸까.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그리고 고민의 끝은 항상 감사였다. 지금인 것에 대해. 다른 누가 아니라 그인 것에 대해. 깊이 있는 음악이라는 것에 대해.

또한 내가 음악에 꽂힌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밖에 나가면 목마른 듯이 그의 음악이 말랐다.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손을 덜덜 떨면서 이어폰을 귀에 꽂아야 했다.

덕질을 하면 할수록 덕주는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음악에서 느낀 환희의 감정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들여다보고 자아의 고갱이를 향해 더 나아가라고. 그의 예술은 내게 영적인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공연 중에 나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여느 때와 같이 좀 더 가까이 덕주를 보려고, 좀 더 많이 눈에 담으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그들의 영상에는 공연을 하다가 어떤 경지에 빠져버린 듯한 표정이 많은데, 그가 또 그렇게 되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 순간 한껏 내밀었던 내 손이 툭 떨어지면서 내 안에 있던 마그마가 끓어 올라 나를 터트려버렸다. 무언가가 내 눈 앞에 펼쳐졌는데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남아 불타오르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날, 알게 되었다. 수많은 글을 쓰고 분석해오던 것들은 그저 이 순간을 위한 전초전일 뿐이었다는 것을.

욕망, 절망, 미움, 유혹, 포기 등등의 감정을 다 끄집어내고 불살라버리게 하는 음악이었다. 온갖 찌꺼기가 씻겨져 나가고 가득 차게 만족스러우면서도 텅 빈 허탈감을 주는, 희로애락의 깊이감이 넘실댔다. <꼬리>라는 곡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것까지 모두 불태워버리자고 소리친다. 잘라도 잘라도 다시 자라나는 꼬리 같은 허상, 남의 눈치, 세상의 이목, 체면, 자격지심 등등이 다 사라지고 오롯이 나만 남았다. 자유로운 나, 충만한 나, 해방된 나를 발견하고 즐기고 누릴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나면 원래의 내가 다시 스멀스멀 기어오르지만, 거기서는 그랬다....


덕질은 도구였을 뿐이다. 나를 향한 여정에 덕질이 좋은 도구가 된다면 그걸 하는 거지, 다른 이유가 있겠나.

좀 더 나아가기로 했다.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이야기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기억 속으로 소환하며, 그런 뜻에서 자아 인식의 원천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행위가 가진 복합성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중대한 개념을 지키는 의무를 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72p


덕질을 하는 덕후가 다 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긍정성과 부정성의 양면이 있는데 유난히 소외되고 억압당한 자들이 가진 것에는 부정적인 것이 크게 부각되어 이미지화된다. 하지만 어쩌다 부정적인 측면이 더 많이 보일지라도 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행위는 복합적이기에 그 뒤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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