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으로 보는 덕후 생활 고찰
어떻게 보면 그는 그 이야기를 꼭 했어야만 했습니다. 말이라는 서술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문학이 존재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경험을 말로 정리하는 것은 우리가 그저 희생양에 머무는 것을 막아줍니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75p
글을 쓰기 시작했다. 페터 비에리의 말처럼 '말이라는 서술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견뎌낼 수 없는 것을 쏟아내는 데도 내 글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형의 인간에게서 나오는 건조체 말고 가슴을 녹이는 말랑체의 글을 쓰고 싶었다. 먼지가 풀썩이는 내면에 물을 뿌리고 싹을 틔울 푸른 글 말이다. 덕심으로 내 가슴은 따뜻했고, 아니 끓어올라 용암이 곧 터질 듯했지만 마음의 휴화산은 여전히 죽은 산과 같았다. 나도 예술이 하고 싶었다. 덕주에게 너무 몰입해서 덕주를 흉내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삶의 방식을 바꿔 고요하게 살아갈 예술을 택한 거라고 해두자. 어쨌든 잠시 잠깐 예술인의 흉내를 내는 취미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다.
국카스텐 대표곡으로 '거울'이라는 곡이 있다.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내 안의 나를 찾고자 몸부림치는 곡이다. '거칠은 손을 내밀며 같이 하자고 말을 하는 넌, 불안한 몸짓으로 난 거울을 보며 나를 찾'는 것은 우리들의 자화상과 같은 거니까, 나도 그들처럼 '조용히 귀를 막은 채 눈을 감으며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런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건조체에서 쉽게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흔들리며 춤을 추다 보면 나도 '나를 안고 야속하게도 키스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내 안에 숨어있던 다른 길을 발견한 것도 같았다.
문학은 경험을 예술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이는 하나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그 경험은 그저 아무 경험이 아니라 글쓴이가 세계와 맺는 관계를 결정짓는 경험이며 그 결정적 역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에게 투명하게 와 닿지 않는 경험입니다. 이야기를 쓸 때 그 뒤를 받쳐주는 에너지는 그 경험을 투명하게 밝히고 그를 통해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고 말겠다는 열정적 욕구에서 발생합니다. 76p
책을 좋아했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책으로 도피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것, 책을 읽고 있으면 자기 탐색을 잠시 멈추어도 마치 나만의 세계가 형성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 아마 그런 것들이 책이 좋다,라고 착각하게 했던 것 같다.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책 속으로 도망치기를 반복하다가 거꾸로 내가 책에서 도망 나와야 했다.
국카스텐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러니까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도망 나온 그곳에서 무엇을 훔쳐와야 했던 것인지(국카스텐의 '도둑"을 들어보라. 가지지 못한 내 것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 한 내가 보일 것이다.), 본성을 거슬러 어디로 향해 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국카스텐의 '미늘'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그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동안 진짜가 아닌 꼬리에 목매여 살고 있었다는 것(국카스텐 '꼬리'를 들으면 내 안에 자라나는 잘라내야 할 것들이 괴성을 지르며 들러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을 직면하게 된다. 다시 거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본다. 글로 쓰고서야 머리로 이해했던 것을 정확히, 투명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의 이야기를 언어로 옮기려는 목적인데, 왜 꼭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일까요? 허구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의 이야기, 지어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중략)... 만들어낸 인물들 속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자신과 더 밀착되는 느낌이 듭니다. 창조적 상상력이 자신과의 친밀감을 만들어주기 때문에, 문학적 표현은 매우 강렬한 현재화된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76p
결혼식장에서였다. 친척 어른들이 다른 분들께 언니와 나를 소개하면서 언니에게는 명확한 이름과 직업을 불러주고 내게는 얼버무리는 것을 보았다.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님에도 그날은 유독 그게 마음에 남았다. 남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인정 욕구라는 것은 그리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더구나 나 스스로도 여전히 자존감이 부족함을 느낄 때, 더 이상 그것은 미룰 수 없는 인생의 숙제가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이름을 되찾기로 했다. 나 스스로 떳떳한 나의 이름 말이다.
덕주는, '인생은 사막에서의 하룻밤'이라고 했다. 사막 한가운데 선 우리는 오아시스를 찾아 떠난다.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길을 나선다. 만일 오아시스를 찾게 되더라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오아시스를 찾아 떠날 것이라고 덕주는 말했다.
내가 길을 나서는 것이 오아시스를 찾는 길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막에서 가만히 앉아 뜨거워 죽거나 목말라죽거나 얼어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을 위한 길이든 길을 나설 것이다. 내게 예술은 그 길 중 하나이다. 사실 나는, 인생은 사막에서의 하룻밤처럼 헛되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별들 아래 수많은 모래 더미 속 작은 점 같은 인간의 단 하룻밤이라니, 얼마나 허무한 것이냐. 하지만 그 하룻밤이 내게는 천년 같은 하룻밤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간과했다. 천년 같은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는 그저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학적 글은 음악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습니다. 하나의 글에는 특정한 숨결, 특정한 리듬, 하나의 멜로디가 있습니다. 84p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 당선작을 받은 고지애 씨는 국카스텐 팬이다. 당선작의 제목도 국카스텐 팬이라면 너무 잘 알고 있는 표현 '알아서 할게요'이며, 수상소감에서도 국카스텐에게 이 영광을 바친다고 밝혔다. 내가 너무나 하고 싶었던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언젠가는 나도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고대한다.
서두르지는 말자고 다독인다. 과정을 즐기자고, 결과물보다 더 값진 것이 과정에서의 즐거움이라고 덕주가 수없이 말해주었으므로. 그럼에도 나는 서둘러댔다. 공연을 앞두고, 덕주를 만나려면 나도 덕주처럼 열심히 살다온 흔적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독립출판으로 그림책을 만들었다. 역시 서툴렀다. 내 글과 그림 속에 나만의 숨결은 있겠지만 그것이 리듬으로, 멜로디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escape velocity. 지난 국카스텐 공연의 주제였다. 대기권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0.000000......1m/sec만큼의 힘만 있으면 된다고 덕주는 설명했다. (과학적으로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상관없다.) 서로에게 0.000000....1의 힘이 되어주자는 얘기였는데, 내게는 그것이 99.9999999999....9의 힘으로 느껴졌다. 덕주가 밀어주니 곧 하나의 멜로디가 담긴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내 안에 고인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음악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문학적 글은 그 글이 가지는 멜로디가 주제, 다시 말해 표현하려고 하는 경험과 정확히 일치할 때 성공합니다. 8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