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된 지평선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으로 보는 덕후 생활 고찰

by 천둥
문학적 이야기는 인간의 행위를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싸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정확성이 문학적 이해를 재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74p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본 적이 있다. 미국 사는 언니가 뉴욕 시내를 구경시켜준다길래 졸래졸래 쫓아갔다가 만난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걸 보고 왜 저기만 저렇게 사람이 많을까, 궁금해서 다가갔다. 거기에 <별이 빛나는 밤>이 있었다.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본 적이 있는가. 자전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목도하게 되는 거대한 소용돌이를. 내가 우주적 존재임을 분명히 자각하게 되는 밤하늘의 깊은 무게감을. 어린 시절 시골 할머니 집에서 봤던 밤하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 정도로 무서웠다. 울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할머니 품속으로 파고들면서도 고개 들어 우주에 대한, 자연에 대한 짙은 경외감을 경험했다.

그림에는 그 밤하늘이 그대로 살아 움직였다. 입을 떡 벌리고 그 어지러움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주저앉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단단히 주면서 보고 또 봤다. 그 느낌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를 하나 사기로 했다. 기념품점에 가서 포스터를 보고는 그대로 내려놨다. 원화의 느낌이 단 1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림이, 원화가 주는 마력을 그때 처음 느껴본 것이다.

단 한 번이지만 예술작품이 주는 충격이라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깨달은 계기가 되었다. 진짜 예술작품이라면 보는 순간 ‘이게 뭐지?’라는 충격적 의문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동시에 극단의 아름다움으로 감탄 정도가 아니라 탄식이 터져 나와야 한다.

예술적 상상은 인간이 가진 한계를 넘기 위한 본능적인 행동양식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것들을 비틀어놓아, 이게 뭐지?라는 외침과 함께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어가 다른 세상의 구멍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뛰어난 예술은 인류에게 선각적인 영감을 주며 인류는 또 한걸음 나아간다.

덕질은 어쩌면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감정적 행위이다. 예술에 반응하는 감각적 태도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감정은 무엇보다 복합적이다. 태초에 인간은 살아남기 위한 일차원적인 본능으로 살았지만, 살아남는 것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벽화를 그렸고 그릇에 질감을 살렸으며 돌탑을 깎았다. 소설 임꺽정을 보면 민초들은 쓸데없이 짚신을 기막히게 잘 꼬았고 파리를 한방에 잡았으며 천리길을 달렸다. 연봉에 매여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고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하는 현대인들로서는 참으로 쓸모없는 짓에 생존을 걸고 살았던 셈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덕질을 한다. 삶 속에는 할 수 있는 쓸데없는 짓이 없어서 인간의 정신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열정을 쏟아낼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야 사는 거니까.

공동체가 사라지면서 관계가 필요한 현대인들은 온라인 네트워크로 관계를 만들어내었다. 각자에게 의미 있는 작고 소중한 무엇들에 공감해주는 관계를 엮어낸 것이다. 반복되는 랜선 속 일상에서 배움을 터득한다. 목적도 없는 이 길 위에서 신명 나게 논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각자 곱씹어가며 터득한 놀이를 랜선 아래 아낌없이 펼쳐놓고 놀이가 곧 배움이고 현실을 헤쳐나갈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을 체득하는 것이다.

공연 가는 날, 아침에 길을 나서는 내게 남편이 몇 시 공연이냐고 물었다. 저녁 7시. 공연이 7시여도 우리는 대낮에 간다. 다 같이 모이자고, 무언가를 하자고 정한 건 아니지만 각자 흩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논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나 스티커를 여기저기 감추어놓고 그것을 함께 좋아해 줄 누군가가 찾아갈 수 있도록 판을 펼친다. 귀여운 가면을 쓰고 달콤한 간식을 나눠주며 분위기를 띄운다. 그런 준비를 못한 사람들은 그저 그들의 놀이를 지켜보고 온라인으로 맞장구치고 같이 즐거워하면 된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아무 대가 없이 하는 서로를 응원하는 것이다.

만일 그곳에 아무것도 없더라도 우리는 기다리는 시간조차 행복할 것이다,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여우처럼. 온전히 달뜬 기대와 설렘만으로 보내는 시간은 전혀 아깝지 않으니까.


문학적 이야기의 정신은 복합성의 정신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 존재인지, 표면을 덮고 있는 이성에 얼마나 자주 구멍이 뚫리는지, 감정적 정체성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72-73p


페터 비에리가 본명을 감추고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쓴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작품은 내 인생 책이었다. ‘모든 게 중요할 수는 없어. 언제나 중요할 수도 없고.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니.’라는 문장을 보고 큰 위로를 받았으며, 한 순간 한순간 의미를 두려던 무모한 시도를 내려놓게 되었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인간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지에 대해 중대한 메시지를 남긴다. 주인공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가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의 안정된 삶을 접고 리스본행 열차를 타는 일탈을 감행한 것처럼, 나도 어느 날 갑자기 덕질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레고리우스가 책 속의 아마데우 프라두의 사유를 쫓는 것처럼 나도 음악 속의 덕주의 사유를 찾아 헤매었다. 그레고리우스가 여행을 떠나고서야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나도 덕질이 시작되고서야 이것이 나를 찾는 여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 지금 내 모습이 아닌 완전히 다른 삶을 선택하는 순간을 철학적 사유로 소환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여전히 모르는 나 자신의 깊이, 인생의 깊이를 존중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임을 깨닫는다.

흥미로운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이해의 지평선을 넓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기 때문입니다. 71p


어느 트위터리안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인간은 예술과 멀어지면 작은 일에도 훨씬 많이 좌절한다고, 행복을 느낄 촉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 살기 위해 예술을 끌어안는 것이다.

언젠가 가수 조용필 님의 팬들에 대한 기획다큐를 보았다. 팬들은 자신이 조용필 님에게 빠져든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족이 아팠을 때, 사업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누군가와의 갈등으로 주저앉았을 때 그의 노래가 손을 내밀었고 일으켰고 나아가게 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 노래가 사연과 함께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노래와 함께 한 것인데. 그럼에도 그들은 조용필 님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울고 웃는다. 그들은 왜 하필 조용필 님이었고, 나는 왜 국카스텐이었을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우연을 통한 것은 신의 영역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자신의 지평선이 넓어지고 있음을 발견하면 된다. 감사하고 다시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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