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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l 14. 2023

핵 폐수를 어쩐다니, 로 시작한 이야기

드라마 <악귀>, 그리고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리뷰

“그나저나 저놈의 핵 폐수를 어쩐다니?”

가끔 전화해서 서로 근황을 나누고 위로하는 사이인 친구 Y가 뜬금없이 정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엄청난 문제 하나 해결 못하는 정부도 짜증 나고 맥없이 끌려가는 야당도 답답하네.”

생각지 못한 대화 소재였지만 뉴스를 접할 때마다 한숨을 쉬던 이슈라 나는 적당히 씹어줄 요량으로 맞장구를 쳤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할까? 왜 다시 촛불을 안 드는 걸까?”

“그러는 너는 왜 안 나가는 건데? 지금도 집회를 한다는데 나도 안 나가지만 주변에 나가는 사람을 못 봤네.”

"맞아... 없어..."

“그러니 누굴 욕해. 무력하게 쳐다보고만 있는 우리가 한심하지."

"근데 왜 그럴까. 이전과 다른 게 뭘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은 이슈들 천지인데 왜 그런 마음이 안 생기는 거지?”


하나마나한 소리로 마무리하려던 나는 그 말을 시작으로 주절주절 떠들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예전과 같은 에너지가 지금은 없는 거 같아. 말의 에너지, 감정의 에너지, 가능성의 에너지, 그런 거 말이야. 나는 말이야, 우주의 기운을 모은다는 말을 참 좋아하거든. 정말 그런 게 있는 거 같아. 우주의 기운을 모아야 행동의 에너지, 실천의 에너지도 생기는 거거든. 그러니까 우선 우주의 기운을 모으는 게 필요한 거 같아.”

“그걸 어떻게 모이게 할 수 있는데?”

뜬구름 잡는 내 말을 Y는 또 진지하게 받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요새 드라마 <악귀> 보니? 거기 아귀가 나오더라. 명품이니 뭐니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들을 아귀로 표현한 거지. 그리고 캐피털이 나오잖아. 현대의 악귀는 캐피털인 거야. 그 악귀가 세상에 아귀를 푼 거지. 그런 대사가 나와. 우리 조상들은 누군지도 모를 아귀들을 가엽게 여겨 문전상, 걸립상 같은 손님상을 차려 그들을 위로해 줬다고.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이지만 남들과 나눌 줄 알았다고. 그런데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더욱 굶주리게 된 아귀들은 갈구하는 사람들을 찾아 씐다고. 정확히 말해 갈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걸신들린 사람들이지. 제 몫이건 남의 몫이건 가리지 않고 욕심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사람들. 그러다 욕심 때문이 아니라 진짜로 굶주린 사람들에게도 아귀가 찾아가게 된 거지.”

“그래서 아귀를 해결할 방법이 있어?”

“그야 사회적 재분배, 그것뿐이지. 근데 드라마가 거기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제발 거기까지 가주면 좋겠어. 그래서 사람들이 캐피털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걸신들리게 하고 있고, 아귀에 씌지 않기 위해서라도 욕심과 욕망이 무서운 거라는 걸 좀 알았으면 좋겠어. 지금은 욕심과 욕망을 인간의 본성으로 당연하게 생각하잖아. 그런 본성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솔직한 거라고 착각하잖아. 2000년에 여러분,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가 처음 나왔을 때는 그게 낯 뜨겁다는 걸 알았거든. 부자 되라는 말이 주는 낯 뜨거운 욕망, 그걸 부끄러운 줄 알았다고. 근데 지금은 어때?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 욕망을 부추기고 자랑스럽게 말하잖아. 거기서부터 우리는 망가지기 시작한 거야."

"그래서 광고가 망가뜨린 걸 드라마가 되살릴 수 있다고?"

"응. 왜냐면, 정치는 못해. 정치로는 한계가 있어. 촛불혁명이 말해주잖아. 아무리 뛰어난 정치인이나 선구자가 저 너머를 가리켜도 시민 다수의 시대정신이 바뀌지 않으면 안 돼."


내 말에 내가 취해 떠드는 소리에 Y는 착실하게 귀를 기울였다.  

“나는 드라마건 문학이건 예술만이 우리에게 미래를 찾아준다고 생각해. 언어로든 이미지로든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주는 거야. 우리가 웅성웅성 가능성을 떠들면 그 소란과 에너지가 모이고 모여 커다란 우주적 기운이 되는 거 같아. 그 기운을 정치 리더가 잘 포착해야겠지. 근데 말이야. 신기한 게 우주의 에너지는 문제를 찾는 것, 깨닫는 것만으로는 잘 모여지지가 않더라. 그걸 어떻게든 긍정과 가능성으로 바꿔 나가야 해. "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는데?"

"그래서 나는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반가웠어. 아, 이 드라마가 시작이 될 수 있겠구나. 아니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왜 착한 드라마는 별로 인기가 없는데 갑자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잖아. 그즈음 <스카이캐슬>이니, <펜트하우스>니 너무 자극적인 소재가 사람들을 지치게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어떻게든 긍정과 가능성으로 가고 싶은 사람들의 의지 같은 게 모인 게 아닌가 싶어. 그리고 사실 우리는 다 알아. 세월호가 다 알려줬거든. 그런 대형 사고는 누군가의 결정적인 실수나 잘못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잘한 일상들, 자잘하게 그냥 대충 넘어간 비리들이 쌓이고 쌓여서 터진다는 것을. 그러니 그건 다시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원칙을 바로잡고 지킬 것을 지키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존중감을 가져야 다는 것을. 그래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한 장면 한 장면, 으레 사건사고가 일어날 거라고 예상되는 그 장면에서 주인공들의 태도가 다르잖아. 우리가 대충 무시하던 것들을 정색하면서 바로잡는  보면서 감동한 거지. 삶의 서사를 바 수 있다는 걸 두 눈으로 목도한 거야"

"근데 왜 그때는 우주의 기운이 생기지 않았어?"


이제 와서 Y는 의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어쩌면 이미 아귀에 씌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러니까 이번에 <악귀>에서 욕망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또 다른 예술이 우리의 시대정신을 이끌어내 줄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다 또 다른 예술이 안 나오면? 그럼 또 시기를 놓치는 거야?"

"아니, 그게 이미 나오기 시작한 거 같아.”

“그래서 우리의 시대정신이 뭔데?”

Y가 갈급하게 물었다. 나는 하, 웃었다.

“나도 모르지. 그걸 알면 내가 선구자게. 그냥 내 생각에 김연수 작가가 이번에 낸 단편집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 <너무나 많은 여름이>라는 책인데, 첫 단편부터 길을 가리켜. 폐허가 된 전쟁터에서 노인이 두 번째 밤, 아니 수없이 많은 밤들을 이겨내는 방법을 말해.”

“뭐라고 말해? 방법이 뭐라는데?”

“그건 책으로 확인해."

"아, 뭐야? 왜 갑자기 광고질이야? 책 볼 테니까 일단 말해봐."

"이거 말하면 스포일러인데.... 그건 바로 흔하디 흔한 평범한 지혜.”

“에이, 정말.”

Y가 실망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대단한 시대정신 따위는 없다는 거지. 가장 흔한 지혜. 우리가 다 아는 사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이 에너지를 모을 수 있는 길이라는 거야. 그것으로 다시 세상의 가치를 쌓아 올리고, 우리 시대의 새로운 정신으로 삼고 반짝반짝 윤을 내야 한다는 거야. 결국 선한 마음이 일상을 변화시켜야만 세상을 변혁할 우주적 에너지가 된다는 거지."

"근데 그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야."


개똥철학을 만족스럽게 떠들었던 나는 황당했다. 누가 또 이런 말을 했단 말인가.

"공자님 말씀. 이기심을 버리고 예의, 다른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는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적어도 남이 나에게 행하기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그렇게 공자는 인의 경지를 설파하지."*

"맞네. 그러고 보면 온고이지신, 옛것을 익혀 새로운 앎을 얻어야 한다는 그것이 다시한번 이루어져야 할 때야."      

개똥철학이지만 내 생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역시 흔하디흔한 평범한 지혜를 다시 떠올려야 할 때다.

Y는 공자건 개똥철학이건 제발 진짜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아니 이젠 진짜 그런 것 같으니 간절히 그리 되길 빌어야겠다고 했다.

"우리가 이런 말을 나누는 것도 어쩌면 우주의 에너지를 모으는 일 아닐까. 내 말은 이런 대화를 다른 사람들과도 자꾸 나누자는 거야. 그게 토론인 거지. 그게 시민의 목소리이고. 웅성웅성 소리를 내다보면 그게 우주의 기운이 되는 거 아니겠어."

처음에 얘기를 나누기 시작한 때보다 조금 더 긍정적으로 변한 우리의 모습이 그 증거다. Y말고는 딱히 이런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단 시작은 했으니까. 우리에게 남은 미래가 폐허라 해도...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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