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덕질을 하는가 2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으로 보는 덕후 생활 고찰

by 천둥
교양을 쌓은 이는 단순한 궤변적 외양과 올바른 사고를 구별할 줄 압니다. 그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지는 일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무엇인가?"와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입니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16p


처음 공연장에 갔을 때 2층에서 스탠딩 하는 이들을 내려다보며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공연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저렇게 서서 기다리다가 두 시간 내내 뛰는 사람들. 게다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살짝 공황이 올 정도였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지옥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비규환이 일어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저기가 지옥이라도 뛰어내려 가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었다. 자석에 철가루가 끌리듯, 덕주가 움직이는 방향대로 시선이, 고개가, 몸이 따라가는 것을 보면서 맹목적인 광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저 안에 내가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그날, 공연이 끝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영혼을 두고 오는 것 같아서 공연장 주변을 서성였다. 지금 내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이 엄청난 파도를 어떻게 잠재워야 하는지, 출렁이는 파도와 같은 감정을 잡지 못하는 이성의 침잠은 도대체 뭔지, 잡히지 않는 질문을 찾아 끝도 없이 걸었다. 단순한 놀라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많은 변화와 수정이 요구되었다. 저 광기 속에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 영혼의 끌림은 정확히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올바른 사고를 구별하는 기준은 '두려움'과 '사랑'이다. 무엇이 두려운가 또는 진정 아끼는 마음인가, 를 놓고 두려움에 관한 것들을 지워나가고, 진정 아끼는 마음이 있는지 살펴보는 방식이다. 나의 두려움은 내 안의 시끄러운 것들이었다. 진정 그들의 음악과 진실되고 생명력 있는 라이브 무대가 나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런 경험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서서히 마음이 정리되자 흩어진 내 영혼이 내 안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뜨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무조건 스탠딩을 한다. 어쩌다 무릎이 아파서 좌석으로 가면, 그 뒤로 더 열심히 치료도 하고 운동도 한다. 내 건강을 지키는 것보다 스탠딩을 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회사에서 내 이름이 적힌 스티커를 맞춰주었다. 회사에 있는 볼펜과 다이어리에 스티커를 붙였다. 또 어디에 붙일까 아무리 살펴봐도 붙일 데가 마땅치 않았다. 그토록 내 생활 속에 내 물건이랄 게 없었다. 그 어느 것에도 애착을 가지고 사는 게 없었던 것이다.

공연을 가고 팬들로부터 나눔을 받고 굿즈를 사면서 내게 소중한 것들이 많아졌다. 누군가는 애착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누군가에게는 애착이 필요하다. 내 삶에, 나라는 사람에,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무언가가 생기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첫걸음이기도 하니까.

평범한 볼펜이지만 덕주 스티커를 붙인 내 볼펜이 있다. 사물이 내게로 와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을 발견한다. 몰랐던 나의 작은 취향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런 작은 차이가 내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면 이때부터 나도 미적인 것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니까. 그저 그런 회색빛 공간으로 가득 찼던 세상이 새로 그려야 할 도화지로 보였다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아, 무엇을 그린 그림이지 이제 알았으니까 다시는 안 봐도 되겠군'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중략)... 우리가 자꾸만 감상하고 싶은 것은 책, 구도 그리고 붓의 터치입니다. 문학적 글의 평가 기준 또한 그림을 보는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줄거리를 이미 다 아는데도 자꾸만 또 읽고 싶어 지는지, 즉 글의 형식 때문에 그 글을 읽고 싶어 지는지가 우리가 문학을 선택하는 기준입니다. 82p


친구가, 공연에 가면 무엇이 제일 좋으냐고 물었다. 대뜸 내 거,라고 답했다. 그제야 내가 온전히 나로서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했었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허지웅은 한 칼럼에서 '뜨거움은 삶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 정작 단 한 번도 채워주지 못했다.' 고 말했다. 알 수 없는 고단함을 너무 정확하게 짚어준 문장이다. 그럼에도 내 안에는 뜨거움에 대한 갈망이 있고 소란스럽지 않게 소진할 곳이 필요했다.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고 공연에 가면서 마치 같은 그림책을 반복해서 읽는 아이처럼 충만함을 느낀다. 덕후에게 덕주는 자신의 뜨거움을 투영하는 대상이다.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판단기준이자 가늠좌로서 덕주는 존재한다.

내 덕주의 음악이라면 뭐든 다 좋지만, 날숨을 내쉬며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면 내 속에서 불이 켜지는 것 같다. 어둠 속에서 촛불이 켜지고 상대방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발견하는 기분이 든다.


예전에 한 커뮤니티에서 덕후분이 올린 글이 있다. 데이비드 홉킨스가 지은 <의식의 혁명>이라는 책에 나오는 인간 인식의 에너지 수준에 대한 이야기다. 그에 따르면, '에너지 수준 600-700 사이로 측정되는 미술 음악 건축물의 걸작품은 일시적으로 (관람하는) 우리들의 의식을 높은 수준으로 데려갈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시간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인정받는다'라고 한다. '에너지 수준 600은 평화의 에너지 장으로서 초월 참나와 같은 각성에 이를 때 느끼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마저도 천만명 중 한 명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만큼 어려운 경지라고 한다. 바로 이것을 우리 덕후들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그 덕후분은 주장한 것이다. 옳구나, 바로 이것이구나, 느꼈다. 덕후들이 덕주의 음악을 들으면서 항상 최고의 감동을 느끼니까 아마도 에너지 수준 600을 오르내릴 것이다. 게다가 주체와 객체와의 구별이 사라지는 경지에 이르니 초월 참나와 같은 각성에도 도달할 것이다. 먼지 같은 존재로 태어나 잠시나마 인류를 위해 이만한 에너지장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다니 보람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어가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능력은 경험을 개념적으로 조직하는 능력입니다. 개념은 행동하는 언어입니다. 개념은 우리가 접하는 사물과 사건을 분류하고 개별적 사건을 일반적인 것 중 하나의 예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중략)... 개념, 즉 언어가 없는 직관은 맹목적입니다. 일련의 술어를 활용할 수 있어야만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47p


언어처럼, 덕질은 경험을 조직한다. 맹목적인 직관에서 어떤 것을 어떤 으로 분류하고 의식이 환하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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