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나보다 10살쯤 어리다(분명히 나이를 들었지만 나이가 크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기억하지 않는다).
5년 전 그녀는 학교 일과 관련해서 내게 뭔가 전하러 잠시 우리 집에 왔다.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화장실 좀, 이라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그날 그녀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가 안심하고 볼일을 보도록 티브이를 틀어 소리를 크게 키워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건 그냥 내가 볼일 볼 때 예민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뿐인데. 그러니까 그녀는 내가 좋아한 그녀가 아니라 나를 좋아한 그녀다. 정말 이상한 취향의 그녀다.
그녀, 경은 그날부터 수시로 우리 집에 반찬을 들고 나타났다. 당시 나는 완전 집순이가 되어 집에 틀어박혀 나가질 않았다. 아이들은 기숙사에서 살고 남편과는 주말부부였다. 혼자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내게 경은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집에서 막 끓인 된장찌개를 한 보시기 담아 차로 10분 거리를 달려왔다. 3층까지 헐레벌떡 뛰어와 문 앞에서 그릇만 쑥 내밀곤 돌아갔다. 그렇게 제육볶음, 김치 콩나물국, 볶음밥, 샌드위치 등등이 내게로 와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었다.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었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 시기를 그녀의 밥으로 연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스로 집순이가 되기는 했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그녀만이 나를 찾아왔다. 경은 현관문을 들어서면서 오늘은 1시간 정도 시간이 돼요, 또는 10분만 있다 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바쁜 와중에도 잠시 잠깐 나를 보러 왔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이상하다고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애초에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사춘기 때 짝사랑하던 남자애 이후로 처음이라고 자신의 감정을 의아해했다.
멋지게 여자들 간의 끈끈한 자매애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녀 스스로 그게 아니라고 하니 그렇게 포장할 수는 없다. 어쨌든 우리 둘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또 다른 내 감정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마음 상태나 행동에 대해 크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나를 좋아해 준 사람은, 어쩌면 내 인생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연애시절 경험한 것보다 더 맹목적이었으니까. 생각할수록 감동스러운 일인데,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것이 맞는지, 내 마음은 그저 고마움뿐이었다. 그것이 그녀에게 항상 미안했고, 그녀는 본인의 감정일 뿐이니 미안할 필요 없다고 했다. 그게 더 미안한 건데...
어떤 이는 그러다 뒤통수 맞는다고 걱정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좀 위험하다고 했지만, 그런 말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실은 그녀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도 않다.
다행히 5년이 넘도록 그녀는 뒤통수를 치지도 위험한 짓(위험한 짓이란 뭘까?)을 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고 하고 무조건 내편이 되어주겠노라고 말한다. 내가 이사를 하면서 그전처럼 자주 보지는 못하는데도.
그녀에게 가장 고마운 것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가까운 이웃이어도 만나지 말라고 단호히 말해준 것이다. 그때 나는 존중받지 못할 때도 그냥 참았던 것 같다. 그들이 무지한 것이니까 상관없다고 넘겼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 그 순간순간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내 감정으로 돌아가 그 무례함을, 모멸감을 되짚었다. 그녀는 가만히 들어주었다. 가만히 내가 다 말하도록 기다려주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말했다. 숱한 뒷말들이 무성해도 나를 믿는다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나도 나를 믿지 못하고 무력해져 버린 그 시절에 그녀는 온전한 내편이 되어주었다. 그럴 때 자신이 어떤 처지가 될지 잘 알면서, 그런 것 따위는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내 글을, 내 그림을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 나만의 느낌이 있다고, 나만의 분위기가 있다고, 자기는 예술을 잘 모르지만 느낌은 안다고 우기면서. 그 우기는 말들이 내가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지탱하게 해 주었다.
내가 공연에 갈 때 데려다 주기도 했는데, 한 번은 나를 공연장에 데려다주고 돌아갔는데 끝나는 시간에 다시 공연장 앞에 나타난 적이 있다. 집과 꽤 먼 거리, 그러니까 밤에 달려도 1시간은 족히 넘는 거리를 다시 달려온 것이다. 남산타워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한강공원에 잠시 앉았다가 가자고 했다. 공연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냥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러자고 했다. 아마 유일하게 그녀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달라고 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때 한강에 가길 잘한 것 같다. 유일한 추억거리니까.
쓰다 보니, 이번 시리즈를 잘 시작한 것 같다. 나의 사람들을 소환해서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 들여다보니, 아니 지금 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니, 지금의 내 마음결이 자세히 보인다.
좀 더 시리즈를 이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