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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13. 2024

사는 게 뭔지

초단편소설, 연작

병희가 언제나 잘하는 건 아니야. 아주 실망스러웠던 적이 있지. 

한번은 친구 현진이의 조부상에 갔을 때인데, 대선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야. 나는 그때 패배감에 절어 있었지. 대선을 이기기 위해 한 것도 없으면서 말이야. 아무도 안 만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책을 본다거나 글을 쓴다거나 하는 모든 일상의 행위를 거부했어. 심지어 밥을 챙겨먹는 것조차 너무 건전해서 화가 났어. 김영하 소설의 제목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처럼, 나를 파괴하고 피폐해지고 싶었어. 동시에 조금이라도 위기적 상황이 오는 걸 견디지 못했어. 한일전 축구도 못보고 드라마조차 갈등장면은 피할 정도였지. 

종잇장처럼 얇은, 바사삭 부서지기 직전의 정신상태였어. 누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그 사람을 증오할 것만 같아 스스로 가둔 측면도 있어.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집을 나섰어. 거의 두 달 만에 첫 외출이었던 것 같아. 조문을 하고 밥을 먹고 있으니 병희와 친구들이 왔어. 그 당시 병희는 화물트럭을 운전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시간이 딱 맞아떨어졌대. 

현진이가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우리들 자리에 잠시 앉았어. 

일은 할만 해? 

병희가 물었어. 병희가 해저터널 정비하는 일을 소개해줬다는 거야. 나는 깜짝 놀랐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진이는 농사를 짓고 있었거든. 갑자기 해저터널 정비라니. 걱정스런 눈길을 눈치 했는지 현진이는 허허, 웃었어.  

안전점검 하는 건데, 별거 없어.   

그래도 점검하려면 열심히 배워야겠네. 기사들한테.  

나는 뭔가 격려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을 해야 할 것 같기도 해서 애매하게 말했어. 

배울 기사가 어딨어? 원래 2인 1조인데 다들 혼자 해. 그냥 나 같은 뜨내기들이. 기사들이야 나중에 도장이나 찍겠지. 

헐, 나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뭐라고 답을 못하고 있었어.  

현진이네 오이 밭에 간 적이 있어. 오이 망과 지지대가 자로 잰 듯 반듯했고 밭에는 검은 비닐 멀칭을 덮지 않고 모래처럼 고운 흙으로 정갈하게 덮여있었지. 오이 뿐 아니라 현진이네 농산물은 지역농협에서도 맛있다고 소문이 나서 나오는 대로 수매해갔대. 그럼에도 생계가 어려워 농사는 아내에게 맡기고 현진이는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어. 현진이 아내 말에 의하면 너무 원칙대로 농사를 지어서 그렇다는 거야. 적당히 농약도 치고 영양제도 싼 거 쓰고 그래야 남는 건데, 현진이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거지. 그런 현진이가 안전점검을 형식적으로 하는 현장에서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겠어. 나는 현진이가 우리에게라도 투정을 부렸으면 했어. 근데 그때 병희가 이러는 거야. 

점검인데 뭐. 힘들 일은 없겠네. 

식탁 밑으로 병희 발을 차고 있는데, 건설노조하는 친구가 그걸 거드네. 

우리도 안전모 쓰고 해야 하는데 그냥 해. 땀 때문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데 어떻게 하냐. 다들 그래.

그래. 며칠만 지나면 다들 선수가 되는 거야. 현장은 원래 그래. 

먹고 살려면 해야지 별 수 있냐. 

비정규직노조 한다는 녀석도, 언론노조 하는 녀석도 말을 그따위로 얹네. 현진이는 입을 쩝쩝 다시다 상주 찾는 소리에 자리를 떴어.  

다들 그렇다니, 원래 그렇다니! 신호수를 배치하지 않아 지게차에 치여 죽고 차단기를 끄지 않아 컨베이어에 끼어 죽고 타워크레인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을 연이어 들었잖아. 아무리 노동자의 죽음이 흔해빠진 세상이라지만, 사흘 만에 한 공장에서 두 건의 사망 사고가 발생하는 데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라니!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병희마저 그런 말을 하다니. 아니, 병희가 먼저 그런 쪽으로 이끈 거 같아 더 열이 뻗쳤어. 믿었던 녀석에게 발등 찍힌 거야. 지 몸 편하니 남들이야 아무러나 상관 없다는 거야 뭐야, 마구 이런 욕을 던지면서 말이야. 


그렇게 바깥을 서성이다 후배 민서를 만났어. 

언니? 영미언니? 어머 어머, 이게 얼마만이야?

민서니? 너 진짜 민서야? 

나는 아직 얼굴을 붉힌 채였지만 반가워서 펄쩍 뛰었어. 

나 민서 맞아. 많이 늙었지? 근데 왜 언니는 하나도 안 늙었냐. 왜 언니만 세월이 비껴갔나고! 

무슨 소리야, 너야말로 그대로인걸. 우리 졸업 후 처음이지? 어쩌면 그동안 한 번도 못 봤을까?

내가 고향 내려가서 그래. 안 오다보니 더 안 오게 되더라. 오늘도 올까말까 많이 망설였어. 

왜 망설여? 이제라도 얼굴 보고 살자. 뭐 하고 사니? 

민서가 내미는 명함에는 지자체 산하기관이 찍혀있고 직책은 무려 센터장이야. 나는 오올, 하며 눈이 휘둥그레졌고 민서는 살짝 어깨를 으쓱했어. 


민서는 농활을 하면서 처음 만나 명동성당에서 같이 단식을 했던 사이야. 호헌철폐를 위한 구국의 결사단식이었지만 우리는 밤마다 먹고 싶은 것을 종이에 적어 빙고놀이를 했었지. 말 그대로 결사적이었기 때문에 살아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비장함이 가득했는데, 민서는 그 와중에도 기를 쓰고 웃을 일을 만들어내는 아이였지.  

민서 아버지는 경찰이야. 그것도 꽤 높은 고위직이래. 시위하다 잡히면 민서 혼자만 훈방이 되곤 해서 민서는 몹시 괴로워했지. 민서 아버지는 민서에게 차라리 정치인이 되라고 권했어. 야당이든 여당이든 관여하지 않겠다면서. 당시만 해도 운동권이 정치를 하는 건 배신이었기 때문에 민서는 들은 척도 안했지. 하지만 어느새 전략적으로 정당운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시민단체나 정부기관 등의 공무원 조직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잖아. 민서는 고향에서, 그러니까 아버지 바로 옆에서 꽤 오랫동안 공장을 전전했고, 나중에는 노동인권 관련 단체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기억이 나.   

그때도 민서를 빼내려고 민서아버지는 백방으로 애썼던 거 같아. 민서아버지의 손이 닿기 바로 직전에 조직에서는 그걸 눈치 채고 민서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역할도 바꾸어주었지. 민서가 먼저 단식을 끝내고 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는 민서가 제일 먼저 뭘 먹을지 내기를 했어. 그리고 나중에 우리 모두 단식을 끝낸 다음에 민서를 만나 물었지. 민서가 먹은 것은 누구도 맞출 수 없는 예상 밖의 것이었어. 그게 뭐냐면, 요플레야. 민서는 일단 보식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요플레를 하나 샀대. 근데 몇 숟갈 되지도 않는 그것을 먹고 배가 미칠 듯이 불러서 그날 아무것도 더 먹지 못했다는 거야.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지. 

     

민서가 조문을 하고 오자 우리는 그때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웃고 떠들었어. 때가 때인 만큼 선거에 대한 이야기, 라기보다는 욕을 한 사발 쏟아내며 각자의 분노와 체증을 토하기도 했지. 잠시 후, 버스시간 때문에 먼저 일어난다는 민서를 핑계 삼아 나도 상갓집을 나왔어. 

언니, 어때요? 그래도 얼굴이 맑은 거 보니, 영 힘들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응. 글쓰기 시작하면서 예전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 너는 어때? 썩 좋지만은 않아 보이는데... 일이 힘들어?

보기에도 그렇죠? 맞아요. 일은 이제 익숙해서 특별히 힘들지는 않은데 알다시피 공무원이라는 게 윗선이 바뀌면 몹시 눈치가 보이는 거죠. 눈치 보고 비위 맞추고 굴욕을 감내하고 그런 게 내 월급 값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속이 썩어 문들어지는 거지. 거기도 이번에 다 바뀌었나?

안 그런 지역이 있나요. 근데...

응?

어후, 아냐, 그냥...

민서는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못하고 계속 삼키는 거야.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와도 타지 않고 내 손만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다음 꺼 탈래. 언니는 괜찮지?

그럼. 난 괜찮아. 

나도 민서를 보내기가 싫었어. 헛헛하고 답답한 현실을 말없이 공감해주는 상대가 있다는 거, 그런 동지들이 곁에 있다는 게 작은 위로가 되었거든. 한참을 우리는 손을 깍지 껴고 흔들다가 어깨를 두드리다가 하나둘 켜지는 가로등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시간을 보냈어. 

나는 상대가 말하지 않을 때는 묻지 않고 기다리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먼저 말문을 열어버리는 때가 있어. 상대방을 위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의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때도 그랬지. 

민서야. 우리 다시 못 만날지도 몰라. 

언니, 왜 그런 말을 해? 말이 씨가 된다는데. 

그러지 않을까? 지금까지 못 만났던 우리가 갑자기 만나질까? 물론 또 만나자고 말은 하겠지만 가까이 살지도 않고 특별한 연결고리도 없이 과연 그게 될까. 그래서 말인데, 그냥 말해버려. 대나무 숲이라 생각하고. 멀리 사는 사람이 좋은 게 그거잖아. 

언니는 역시. 흐흐흐.

민서는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소리를 내며 구두코를 콕콕 찧었어. 그러더니, 사실은 나, 대선 투표 안했다, 하고 빠르게 말했어. 

민서가 한 말의 의미가 내게 와 닿기도 전에 민서는 계속 땅만 쳐다보며 너무 지긋지긋해서, 라고 덧붙였어.      

그때 내가 민서 등에 올리고 있던 손을 내렸던가. 어깨를 맞대었던 민서가 몸을 움츠렸던가. 마침 온 버스에 민서가 오르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어. 우리는 서로 얼굴이 보이지 않기 위해 움직였어. 민서는 사람들 뒤로, 나는 정류장 기둥 사이로. 몸이 부르르 떨렸어. 뭐라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이 느껴졌어. 그런데 또 나는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민서만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꽤 된다는 걸. 그런 우리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다는 걸. 

당분간 우리가 만날 일은 없을 거야. 민서는 나를 마주보지 못할 것이고 나는 민서를 피하고 싶으니까... 진짜 말이 씨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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