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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y 20. 2024

잘 살 거야

초단편소설 연작


전에 말했던 친구 말이야. 장애인복지센터를 한다던 친구. 그 친구를 평소에 부러워했어.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면서 먹고살 돈도 벌기 때문이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러기가 어디 쉽나? 사회복지사라고 해도 쓸데없는 행정 때문에 진짜 해야 할 일을 놓치기도 하고, 버젓한 직업은 있지만 쓸모없는 일만 하는 불쉿 잡들이 넘쳐나잖아. 그 어느 때보다 과로하는 사회이면서 효능감 제로의 사회인 것 같아. 근데 그 친구는 사회에서 가장 소수자들을 지원하는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돈도 벌잖아.

‘의미 있는’, 이게 중요한 거야. 요새 애들은 돈 잘 버는 게 1순위라고 말하지만, 속을 잘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아. 1억을 준다면 감옥도 가겠다는 둥 하는 밈이 한때 유행을 했는데 그 말은 의미 없는 불쉿 잡이나 사람 취급을 안 하는 그림자 노동이 지겹다는 말이지 진짜 못할 짓을 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거든. 근데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그 정도면 꼬아서 해석하는 거라고?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렇게 꼬아서 듣고는 돈밖에 모르는 애들 취급을 하다니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심지어 스스로도 자신의 진짜 마음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근데, 복지센터가 진짜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돈을 버냐고? 에이, 그렇지 않지. 장애인 복지보다 원장들 배 불리는 복지에 힘쓰는 경우가 허다하지. 돈을 받기는 하지만 열정페이로 착취당하는 게 훨씬 많고.

그 친구도 처음에는 그렇게 착취당하고, 머릿수로 돈이 되는 장애인을 계산하는 원장들 태도에 질리고, 결국 시키는 말을 들어야 하는 중간위치에서 괴로워했대. 그러다 아예 복지사들과 힘을 합쳐 협동조합을 만들어버린 거야.

이 친구가 그런 운명을 타고났거든. 거창하게 무슨 운명이냐고? 들어봐, 세상사 절망만 펼쳐지는 것 같다가도 이런 삶도 있구나 싶은, 내가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희망 편 이야기야.   

   

원래 이 친구는 대학 때 운동을 접하고 바로 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했어. 현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부당한 일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바로잡았고 사람들의 신뢰를 쌓아 모임을 만들어 조합을 이루어내는 등 보기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잘하는 편이었어. 주변의 다른 현장들과 관계를 맺고 연대하면서 지역운동으로 확산해내기도 했지. 지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 자신이 얼마나 잘해나갔는지를 눈빛을 반짝이면서 자랑하는데 활동가로서의 자부심이 넘쳐나곤 해.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거야. 그동안은 혼자 사는 거니까 모든 에너지와 돈을 동료들에게 쏟아부어도 좀 덜 먹고 덜 쓰고 덜 쉬어도 괜찮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렇게 일상을 꾸려갈 수가 없었어. 부부가 매일 새벽같이 나가 밤늦게 들어오고 주말도 없이 일하고 모임하고 투쟁하는 삶. 살림은 점점 쪼들리고 아이들은 방치되고 건강조차 나빠졌어.


그러던 어느 날, 가족이 여행을 갔는데... 사실은 도망이었다고 하더라. 해야 할 일정이 빼곡하게 있는데 숨이 막힐 것 같았대. 동료들에게 말도 안 하고 도망치듯 어딘가로 갔었나 봐. 공장이 다닥다닥 모여 있고 월세 방이 게딱지처럼 붙어있는 동네를 떠나 산과 들이 드넓게 펼쳐진 자연 앞에 딱 서고 보니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더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야반도주처럼 짐을 싸들고 시골로 숨어들었어. 동료들에게 이야기하면 이해해 주겠지만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나 봐. 그렇게 1년인가 살았어. 어머님을 모셔오고 작은 땅을 사고 집을 짓고...

뭐 먹고살았냐고? 콩나물이나 두부, 담배, 새우깡, 쭈쭈바를 팔았대. 서너 동이나 되는 아파트 앞 상가 지하에 있는 작은 마트를 운영했는데, 팔리는 건 그 정도밖에 없다더라. 원래 그 친구가 상상한 게 그런 거였대. 점빵 알지? 시골 마을 어귀에 있는 작은 점빵을 지키는 한가로운 주인장. 천 원짜리 몇 개 주고받다가 파리채 들고 꼬박꼬박 조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나. 하도 많은 사람들과 많은 회의를 하고 많은 일들을 벌이면서 바쁘게 살아왔기에 그렇게 유유자적을 누리고 싶었던 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녁 찬거리를 제일 많이 고민한 건 그 친구일 거야. 어쨌든 운영비와 생활비는 나와야 하니까, 열심히 기획세일, 반짝 세일, 시즌 세일 등을 하면서 살았어. 그래도 낮이면 꼬박꼬박 졸다 말고 내게 전화해, 오늘은 어떤 꼬마가 오백 원짜리 초콜릿 세 개를 들고 백 원짜리 세 개를 당당히 내놓더란 이야기를 전해주는 일도 잊지 않았지.      


그렇게 자리를 잡나 하던 차에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알려졌어. SSM(기업형 슈퍼마켓)이라고 하는 거 말이야. 그게 들어오면 작은 마트들은 그대로 문을 닫고 생계를 잃게 되는 거거든. 그래도 대형마트가 생기면 고객 입장에서는 좋은 거 아니냐고? 마트유목민이라는 말 알아? 작은 마트들이 없어지면 차가 없는 사회적 약자들은 유목민처럼 떠돌게 될 거라는 말이야. 동네에 철물점이 없어져서 못 하나 사려면 인터넷에서 택배비 4천 원을 들여야 한다잖아. 그런 게 마트유목민의 전조야.  

생계가 위협당한 친구는 나들가게들을 모아 연대협의체를 만들었어. 점빵이 공식용어로는 나들가게라고 하대. 나들가게협의체 대표가 되어 대형마트입점반대운동을 벌였어. 그때가 마침 대형마트들이 지역으로 마구 번져나갈 때야. 친구가 살던 지역 말고도 이미 몇 군데가 이미 지역상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입점되고야 말았거든. 당연히 패배감이 만연했대.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이기냐고. 그런데 그 친구는 해내고야 말았어. 대대적으로 기사회가 되기도 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승리였대.

덕분에 옛 동료들이 그 친구 소식을 모두 알게 되었어. 미리 그곳에 가서 준비하고 있다가 큰 성과를 낸 걸로 착각하는 동료들도 있더라나. 아무튼 본업을 피해 거기까지 갔지만 다시 본업을 하게 된 운명인 거지.       


친구는 몇 해쯤 나들가게 대표로서 지역유지(?) 노릇을 하더니 마트를 그만두고 버스운전을 하겠다고 나섰어. 앉아서 꼬박꼬박 조는 게 지겨웠나 봐. 발발거리고 돌아다니겠다니.

버스운전은 대형차운전 경력이 있어야 할 수 있대. 한동안 화물차운전을 하고 마을버스도 하다가 드디어 버스운전사가 되었어. 구불구불 시골길을 갔다가 왔다가 또 가는 그 생활이 너무 평화롭다더군.

한 번은 그 친구가 사는 옆 동네로 여행을 갔어. 자고 아침에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바로 앞에 넓은 강이 흐르는데 너무 아름다운 거야.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고 자랑하려고 사진을 찍어 그 친구에게 보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너 당장 밖으로 나와 봐, 이러는 거야. 왜? 물어도 일단 나와 봐, 하면서 어찌나 재촉을 하는지 신발도 채 발에 못 꿰고 뛰어나왔어. 잠시 후 버스 문이 열리고 그 친구가 헤헤 웃는데, 어찌나 놀랍고 반갑던지. 버스 안에는 어르신들이 몇 분 계셨는데, 우리의 인연을 같이 신기해하며 그 순간을 충분히 누리도록 여유롭게 기다려주셨어.


그렇게 그 친구가 버스 운전사가 된 모습을 구경하고 얼마 후, 버스를 그만두고 장애인복지센터의 셔틀버스를 운행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려왔어. 그것도 운전이니까 그러려니 했는데 장애인친구들이 너무 순수하고 좋다는 말을 자꾸만 되뇌더니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더라고.      

근데 하필 그곳은 복지센터 중에서도 악명 높은 곳이었나 봐. 그 친구는 어떻게든 그곳에서 조금 덜 나쁜 방향으로 움직여보려 노력했어. 하지만 원장의 욕심과 패악을 당해낼 수 없었고 결국 직접 센터를 만들기로 작정을 한 거지.

함께 하던 복지사들과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국가에서 나오는 지원금이 최대한 장애인 당사자들에게 혜택이 가도록, 복지사들은 일하는 보람을 느끼고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원장’이라는 권력이 생기지 않게 돌아가면서 대표를 맡도록 최적의 시스템을 만든 거야. 어때? 운명이라 할 만하지?

참, 국가에서 지원금이 나오기까지 몇 년간은 생계와 운영비를 벌기 위해 복지사들이 대리운전 등을 하면서 고생을 했대. 처음부터 국가지원이 되는 건 아니거든. 그간의 세월 동안 그만두고 싶어 하는 동료가 없었겠어? 서로 뜻이 척척 맞기만 했겠어? 가족들이 언제나 응원만 했겠어? 당연히 힘든 시간들을 보냈겠지.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날을 향해 서로를 붙들어주고 격려했겠지. 그런 단단함이 부럽지.      


더구나 장애인 회원들과 연극을 시작했어. 그 친구가 젊었을 때 대학로 주변을 좀 얼쩡거렸거든. 운동한다고 미뤄두고 먹고 사느라 미뤄두었던 꿈을 장애인들과 펼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 친구가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을 하더라. 운동이야 그렇다 쳐도 글도 쓰고 연출도 하다니 너무 능력자 아니냐고? 그건 능력으로 하는 게 아니야. 장애인들 삶을 녹인 이야기거든. 굳이 말하자면 사람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는 능력 하나뿐이야. 문 닫았던 마트 공간을 극장으로 개조하고 정식으로 극단을 창단하더니 올여름에는 극단이 서울로 진출한다는 거 보면 능력이 출중한 것 같기도 하네.

어때? 그 운명 부러워할 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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