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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y 15. 2024

잘될 거야

초단편소설 연작

얼마 전 선거 때 말이야, 참관인 활동을 했어. 그 당시 내가 한 정당에 정말 미쳐있었거든. 아니, 당이 아니라, 그 정당의 구호에 미쳐있었던 거지. 매일 SNS와 유튜브를 들여다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이 구호에 열광하는지를 실시간으로 봤어. 그러니까 3년은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 세력이 어마무시하게 커가는 걸 생생하게 보고 있었던 거지. 풍선이나 튜브 같은 것에 바람 넣는 펌프 알지? 그게 한번 펌프질을 할 때마다 슉슉 커지는 게 보이잖아. 그렇게 눈에 보이게 커지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과격한 면이 있잖아. 사실 나는 그게 커지고 커져서 뻥, 하고 터지길 바랐던 거 같아. 터지다니, 그게 무슨 뜻이냐고? 음, 굳이 말하자면 혁명?

이 시대에 혁명은 불가능하다지만, 나는 혁명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오늘날 혁명은 왜 불가능한가?>라는 책까지 나왔는데 무슨 혁명이냐고? 그러게, 난 그 책을 보고 좀 절망스럽더라. 아, 읽어보지는 않았어. 설득될까 봐. 난 개인적으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BTS 때문이라고 생각해. 아니, 왜 입을 틀어막고 그래. 나도 알아, 위험한 발언이라는 거. 하지만 입틀막이라니, 직접 당해보니 더 끔찍하군.

들어봐. 나쁜 의미가 아니니까. 예전에 온 유럽이 68 혁명으로 난리가 났을 때 영국만 평온했대. 그 이유가 비틀스 노래에 다들 힐링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썰’이 있어. 어디까지나 썰이야. 같은 이유로 온 세계가 이렇게 빈부격차가 심하고 불합리하고 여전히 불평등한데도 사람들이 묵묵히 견디는 건 BTS의 좋은 음악 덕분이 아닐까. 이건 그냥 내 주장일 뿐이야. 아무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울하고 정신질환에 걸리면서도 버티는 건 BTS음악처럼 숨구멍을 찾아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면서 나름 힐링을 하기 때문인 거 같아. 각자도생이니까. 억울함과 분노를 쌓아 올려 혁명으로 분출하는 게 아니고.

BTS가 잠시 조용한 틈을 타 나는 이 분노가 끓어오르기를 바랐던 거지. 3년은 너무 길다, 3년은 정말 너무 길다, 3년은커녕 세 달, 아니 3일도 너무 길다, 하면서 부풀어 오른 풍선이 선거를 통해 빵 터지길 바랐어. 거의 혁명의 수준으로 말이지.

그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참관인 신청을 한 거야. 그러려면 투표소 참관보다 개표소 참관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일면 그것도 맞는 말인데, 나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어. 곧 천지개벽이 될 것을 아는 자들의 은밀한 표정, 새 세상을 맞이할 갈망하는 눈, 섬처럼 동떨어진 삶이지만 물밑으로 흐르는 공감과 연대의 몸짓,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그런 에너지가 오고 갈 거라고 믿었던 거 같아. 너무 방구석에 오래 있었다고? 맞아. 인류가 망한다면 아마 알고리즘 때문일 거야.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가 뭐냐고 묻는다면 알고리즘이라고 답할 거야.       


아무튼 그런 마음으로 신청을 했으니 얼마나 열심히 했겠어. 눈에 불을 켜고 부정한 행위가 없는지 살피고 선거인들이 행여 실수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지켜봤지. 이번 선거에 투표용지가 좀 길었어? 온갖 위성정당들이 난립했잖아. 비슷한 이름도 많았고. 우리 조국혁신당이야 이름이 너무 확실하니까 헷갈릴 일이 없지만, 반대쪽 표가 분산되는 것도 중요하잖아. 반대쪽 사람들이 실수해 주기를 바란 거냐고?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실제로 투표하러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어르신들이 정말 많았어. 이번엔 번호도 3번부터였잖아. 1번 아니면 2번 찍던 분들이 동공지진이 일어난 거야. 이게 뭐냐, 어디다 찍어야 하느냐, 왜 정당이 이것뿐이냐, 1, 2번이 없는 게 맞느냐, 이거랑(후보가 적힌 지역구 용지) 똑같은 정당은 왜 없느냐 등등. 투표 관리하는 사람들이 고생 많았지. 한 번은 한 참관인이 똑같은 정당이 있다면서 그 선거인에게 알려주려는 바람에 난리가 났어. 투표관리관이랑 그 참관인이랑 실랑이를 하는 사이, 같이 온 지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려고 기를 쓰고 우리는 그분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고.


저렇게 모르면서 뭐 하러 굳이 투표하러 나올까 생각하고 있는데, 참관인들이 구시렁거리면서 입맛을 다시는 거야. 미리 잘 좀 단속해서 오지, 여기 와서 저러면 어떡해? 아까운 표 하나 날렸네...

나는 기가 막혀서 그 사람을 빤히 쳐다봤어. 참관하러 온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함부로 내뱉지? 분노가 치밀었어. 그동안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깜깜이 투표를 해왔겠어.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것만 깜깜인가,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이것만 찍어,라고 시키는 것도 깜깜이지.      

부부가 같이 오신 어르신들 중에는 남편 분이 투표용지를 받아 들고 아내에게 이거 찍으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많았어. 먼저 물어오는 아내들도 가끔 있었지만, 나도 안다고 하는데도 자꾸만 들이밀면서 잘하라고 다그치더라고. 그럴 땐 내가 나서서 막았어. 어르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젊은(?) 여자가 웬 참견이냐고 성질을 내려던 남편 분이 내 목에 걸린 명찰을 보고 잠시 멈칫하는데, 투표관리관이 끼어들었어. 어르신, 투표소에서 후보를 지목하는 것은 위법이거든요.

다시 참관인들이 구시렁거려. 아이고, 부부끼리 알려줄 수도 있지 뭘 그래? 어차피 투표소 밖이나 안이나 부부인 건 똑같은데.

나는 흥, 하는 표정으로 앞만 바라봤어. 뒤에 줄 서있던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와. 저 양반, 혼자 똑똑한 줄 알지. 요샌 여자들이 더 잘 아는구먼. 냅 둬, 저런 양반들이 집에선 또 절절매고 살아. 무슨 소리, 밖에서 저렇게 지 마누라 무시하는 거 보면 집에서도 뻔해.

그 순간 그 남자 어르신이 기표소에서 표를 바꿔달라고 소리를 치는 거야. 실수로 잘못 찍었다면서. 그건 안 된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야. 여자 어르신은 그 꼴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면서 그냥 밖으로 나가버려. 혼자 가시면 어떡해요? 모시고 가셔야지, 해도 소용없어. 쌩하니 가버려. 남자 어르신은 한참 동안 떼를 쓰다가 투표용지를 바닥에 패대기치더라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       


치매어르신을 모시고 온 사람이 있었어. 휠체어를 타고 있었는데, 신분증을 내고 보호자가 손을 비틀어서 지장을 찍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어. 그전에도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이 보호자와 함께 온 경우가 많이 있었으니까. 자기 주민번호를 기억 못 하기도 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해도 못 알아듣고 눈만 껌뻑이기도 했지. 그래도 눈이 침침해서 안 보인다고 돋보기를 달라거나 불 있는 데서 보고 들어가겠고 기표소 밖 형광등 아래에서 투표용지를 한참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고, 다들 꽤나 자기 의사를 분명히 했거든. 근데 이 분은 아예 눈을 못 뜨고 있고 누가 봐도 아무 의지가 없어. 그냥 끌려온 거야. 보호자가 투표용지를 쥐어주는데 그걸 받아 들지도 않아. 그런 사람을 기표소에 밀어 넣고는 엄마, 찍었어?라고 보채는 거야. 스르르 투표용지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아무 답도 없고. 그랬더니 자기가 기표소 안에 들어가서 돕겠다고 우기는 거야. 그게 돕는 거냐고. 자기가 찍는 거지. 그렇게라도 지키고픈 당이 어딘지 몰라도 엄마의 권리는 그렇게 지킬 수 없을 텐데 말이야.      

참관인들은 혀를 끌끌 찼어. 정신없는 노인네를 데려와서 무슨 짓이냐, 정신이 들면 그때 해야지, 누굴 찍고 싶어 저러는지 몰라도 참 못할 짓이다, 등등. 근데 저렇게 판단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투표권을 안 줘야 하는 거 아냐? 누군가의 말에 다들 입을 꾹 다물었어. 그도 그럴 것이 판단력이 있고 없고를 누가 가릴 거야? 그리고 판단력이 없으면 국민이 아닌가?      


그때 장애인들이 단체로 왔어. 손발이 자유롭지 못한 분들이 많아서 시간이 오래 걸렸어. 도장 찍는 거, 투표용지 접는 거, 기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거, 전부 그들에겐 용이하지 않아 보여. 그거야 줄이 좀 길어지더라도 천천히 하면 돼. 근데 자꾸 투표용지를 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문제야. □번이에요,라고 크게 말하기도 하고, □□당은 여기 있어,라고 동료에게 말해주기도 해. 말려도 소용없어. 네,라고 대답하고선 다시 □번 찍는 거야, 소리쳐. 기껏 줄 서서 투표용지까지 받아 들어놓고 안 하겠다는 사람도 있어. 그럼 그냥 투표함에 넣으시라고 하면 눈치를 보다가 다시 기표소 안에 들어갔다가 또 그냥 나오고...       

그걸 보는 참관인들 만면에 웃음이 피어나. 껄껄 웃음을 터트리기도 해. 나 혼자 붉으락푸르락 이야. 아니, 세뇌교육시켜서 하는 게 무슨 자유투표냐고, 저 정도면 비밀투표가 아닌 거 아니야? 수십 년 동안 이런 식으로 멋모르는 사람을 이용해서 관권선거를 해왔던 거야. 왜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는 건지 알겠더라고. 단체로 교육시킨 게 뻔한 걸 내 눈으로 목도했지만 그걸 신고할 수는 없잖아. 뭔가 불법적인 요소가 없나 눈을 부릅뜨고 지켜봤어. 꼬투리가 잡히길 바랐는데 아무것도 없었어. 조직적인 행위는 이미 끝난 뒤니까...

가만 보니, 참관인 중 한 사람이 장애인들을 모시고 온 사람과 눈으로 인사를 하더라고. 수고가 많다 뭐 그런 눈빛이 오갔고, 투표를 하고 나온 장애인들에게도 어깨를 툭툭 쳤는데, 내 눈에는 잘했느냐, 걱정 마라 그런 대화가 오간 것으로 보였어.

그 참관인은 극우 중에서도 극우인 정당 소속이었는데, 참관인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걸 보면 임원쯤 되는 것 같아. 이 지역에 오래 살았는지 오며 가며 인사하는 사람도 많았어. 지역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바로 그런 건가 봐. 나처럼 혼자 유튜브 보고 광분하고 끼리끼리 모여 성토하고. 그거 아무 소용없어. 혁명은 그렇게 일어나는 게 아니었어. 저 바닥으로 들어가 밑불을 놓아야 하는 거였어.      


그날 저녁 알 수 없는 패배감에 늘어져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어.

야, 잘될 거 같지 않냐?

뭐가?

이번 선거, 잘 될 거 같아.

아휴, 나는 한숨을 쉬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어. 이 친구가 발달장애인 복지센터를 운영하거든.

장애인들과 생활하는 이 친구가 이번 선거를 어떻게 준비했을지 너무 궁금한 거야.  

너희 회원들도 사전투표 했냐?

당연하지, 오늘 다 하고 왔지.

답하는 친구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가득했어.

야, 우리는 매일 뉴스 브리핑을 하는 사람들이야.

뉴스 브리핑을 한다고? 진짜? 그냥 네가 브리핑을 하는 거 아니고?

얘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우리 회원들이 신문을 얼마나 열심히 보는데. 중요한 뉴스가 뜨면 먼저 달려와서 이 뉴스를 다뤄야 한다고 그러고, 토론은 또 얼마나 열띠게 하는데. 이번 선거에 대해서도 다들 나름의 전망을 내놓을 수 있는 수준이야.

그래서? 이번에 선거하러 갈 때 연습도 했어?

그럼. 며칠 전부터 여기를 진짜 투표소처럼 꾸미고 투표용지도 만들고 기표소도 만들어서 예행연습을 했지.

나는 그제야 구겨진 얼굴을 폈어. 그래, 잘 될 거야. 잘될 거 같아. 나도 모르게 친구의 말을 따라하고 있었어. 그렇지 않아? 잘될 거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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