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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un 19. 2024

연두연두 완두콩

아침나절에도 조금만 꾸물럭거리면 금세 더워져서 아예 저녁으로 산책시간을 옮겼더니 서늘하기는 한데 원하는 풍경을 보기 힘들다. 아니, 풍경은 어느 때나 나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만 사진으로 담기는 어렵다. 태양과 어우러지지 않은 꽃들은 빛을 잃은 별과 같다.

 

게다가 자잘하게 풀밭을 수놓았던 꽃들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금계화 코스모스처럼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꽃들이 바람 길을 등에 업고 손짓을 한다.  접시꽃 분나무처럼 익숙한 꽃들은 발견하는 기쁨이 적어 설렁설렁 보게 된다. 천일홍 봉숭아는 가을과 첫눈을 기약하기에 아직 눈길이 가지 않는다. 간사하게도.


덕분에 성큼성큼 걸어 아파트를 벗어나 큰 길가로 갔다가 늦은 시간까지 팔리지 않은 완두콩 한 바구니를 만났다.

오늘은 요놈이다. 꽃은 아니지만 이 계절을 풍요롭게 하는 완두콩.


집에 오자마자 삶아 꼬투리째 한입에 호로록. 달다. 계란과 같이 삶느라 소금을 약간 쳤더니 간이 되어 더 달다. 호록 호록 먹다가 한 알 한 알 먹다가 연두를 감상한다.

아이 어릴 때 오종종 붙은 발가락을 보며 완두콩 먹듯이 호로록 쫍쫍 빨던 기억.

콩알만 하다는 말이 그렇게 아름다운 말인지 미처 몰랐다.

콩알이 그렇게 빛나는지 미처 몰랐다.

콩알이 그렇게 연한지 미처 몰랐다.

생명이 그토록 생생한지 미처 몰랐다.  

그때처럼 오늘도 완두콩이 너무 생생해서 웃음이 절로 난다. 오늘치의 행복.

내일은 밥에 넣어먹고 샐러드에 넣어먹고 식탁 위에 놓고 오며 가며 먹어야지. 모레는 수프도 해 먹고 카레도 해 먹고 후무스도 해 먹어야지. 완두콩 계절이 끝나기 전에 왕창 사다가 1년치 행복을 냉동실에 쟁여둬야지.  



#완두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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