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비현실적인 탄핵정국을 지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순간, 아름다운 광경을 자주 접한다. 가슴 벅차게 타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묘하게 덕질문화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매일 또는 매주 집회가 시작되자 SNS에서는 덕후들의 정치발언이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수많은 집회 가이드도 이어졌다. 집회 준비물 및 착장이라든지, 화장실 참는 법이라든지, 민중가요 추천타래라든지...‘빠순이가 집회에 최적화된 이유’라는 글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덕후들은 원래 타임라인에 덕질 말고 쓸데없는(!) 정치 글이 보이는 걸 정말 싫어한다. 그런데 이번 계엄으로 어쩌면 앞으로 내 덕질을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낀 것이다.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앞장서서 탄핵을 외칠 수밖에 없다.
뒤늦게 덕질세계에 뛰어든 덕후(나는 덕질로 한 권의 책을 냈다.[브런치북] 교양 수업으로 보는 덕질 고찰)의 눈에 그런 덕후들의 참전(참여)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실시간으로 탄핵집회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지만, 덕후들의 점진적인 변화를 지켜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SNS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빛의 혁명이라 불리고 깃발의 바다가 펼쳐지는 집회를 내 눈으로 보고 싶어서 매일 마음은 서울에 가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KTX 타면 한시간만에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해도 물리적 거리와 심리적 거리라는 장벽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결국 두어 번 만에 현타가 왔다.
그래, 서울만 집회 하겠냐, 지역에서도 하겠지. 그렇게 내가 사는 지역 대전에서 하는 집회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음까지 먹을 일인가 싶지만, 그때는 아직 은하수네거리가 어디인지도 몰랐을 때였다.
대전 은하수네거리. 사거리도 아니고 네거리라 불리는(어느 블로거에 따르면 대구와 대전만 네거리라 부른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곳은 서울의 강남 같은 번화가로 서울의 광화문 같은(자꾸 서울에 비유해서 미안하지만, 대전에 온지 N년차인데도 아직 지역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유구한 집회의 역사가 담긴 현장이다. 이번에도 계엄 다음날부터 내내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만 몰랐지.
은하수네거리에도 서울처럼(또 서울...) 응원봉이 있었고, 청년이 있었고, 여성들이 있었고, 깃발이 있었고, 끊이지 않는 시민발언들이 있었다. 그렇지, 바로 이거야. 나는 비로소 흡족하게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제 곧 파면만을 앞둔 시점이 되자 불현듯 지금까지 만난 수많은 집회 참가자들이 이대로 흩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예전의 ‘나’가 아니라 시민으로서 각성된 나, 적어도 정치를 외면하지 않을 나, 연대하고 연결되는 나로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지금 우리가 느끼고 있는 이 뜨거운 무언가의 정체를 한번쯤 나눠봐야 하지 않을까, 서로가 느낀 것들을 내어놓고 모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무얼 하지?
부정하고 혼탁하고 광기어린 현실일수록 좋은 사람, 좋은 목소리,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자. 대전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자. 덕후는 어떻게 광장으로 나오게 되었는지 기록하자. 뻐렁치는 감동을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