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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가지 마세요

네번째 인터뷰, 평화

by 천둥 Mar 12. 2025

국회 앞, 여의도, 남태령, 한강진, 거통고조선, 전장연 혜화역 출근길투쟁, 구미옵티컬 희망뚜벅이, 대전 은하수네거리, 동덕여대, 서울시교육청 지혜복 교사복직투쟁, 오이도 리프트사고 24주기, 구로구청 청소노동자 파업출정식, 대전 방위사업청 1인 시위, 연대투쟁호 진수식,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송파구 청소노동자 복직투쟁, 카라 노조 기자회견, 세종호텔 농성장, 성북구청 성노동자생존권투쟁, 고 황유미 18주기 추모대회, 반도체특별법저지투쟁, 38여성파업전야제, 전국노동자대회...      

계엄 이후 ‘평화’(20대 후반, 충남, 은둔청년)가 간 곳들이다.



연대투쟁의 특성상 두 번 이상 간 곳도 많다. 당연히 매주 토요일에는 서울이든 대전이든 윤석열탄핵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이 정도면 전문 시위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믿기 어렵겠지만, 그가 집회에 참여한 것은 12월 7일 국회가 평생 처음이다. 퀴어로서 청소년 시절에 가본 퀴어퍼레이드와 강남역(살인사건)에 헌화한 것, 세월호 참배가 유일한 정치참여다.

그는 홀홀단신 무연고자로 주변인들과 교류 없이 사회와 거의 단절되어 살아왔다. 기초수급과 약간의 알바로 먹고 사느라 바빴고, 태생이 겁쟁이라 누군가에게 욕설 한 번 해보지 않았으며 준법시민으로서 파업도 집회도 알지 못했다.

수많은 말벌 동지가 그렇듯이 계엄이 ‘평화’를 열혈활동가로 만든 것이다.   


      

그가 이토록 적극적으로 연대에 나서게 된 것은 “나 한사람이라도” 보태서 안전해진다면 하는, 아주 작은 개인적인 소망에서 시작되었다. 퀴어인 그는 엘라이(ally, 협력자, 동반자를 뜻한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고 차별을 반대하는 사람)가 많아져야 안전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다. 퀴어들 사이에 엘라이가 많이 섞여있어야 혐오와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다.  

국회 앞에서 집회할 때는 아직 평등집회 수칙이 없던 때라 페미니스트임을 밝히는 이들에게 야유가 나오기도 했고, 아직 깃발도 많지 않아 무지개깃발(프라이드 플래그)을 들기가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그의 깃발을 보고 다가와 “저도 퀴어에요”, “깃발 고마워요” 라고 속삭이는 이들이 있었다. 자신의 참여가 안전해지는 데 보탬이 된 것 같아 더 큰 용기도 낼 수 있었다.         

대전보다 서울집회에 더 많이 간 것이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방은 사람이 많지 않아 성소수자들이 안전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나 한사람이라도” 보태야 하는데, 서울에 드나드느라 그러지 못했다. 윤석열이 석방된 바람에 민주노총 대전지부에서 매일 저녁 집회를 한다니 이제부터라도 계속 대전에 참여할 생각이다.  

현재는 대전에 살지 않지만, 독립할 때부터 대전에 살아서 그런지 대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자주 참석하지는 않아도 대전집회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인다. 얼마 전에는 대전집회주최 측에 변희수 하사 4주기를 언급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주최 측은 흔쾌히 받아들여주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사회적 참사 관련하여 더 신경 쓰겠다고 했다.       



남태령 집회를 시작으로 광장이 점차 성소수자에게 안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강진에서 시민발언을 했는데 3연속 논바이너리가 이어질 정도였고, 화장실에는 성중립화장실이라는 안내문이 붙기도 했다. 뉴스에서는 “이번 광장에서 성소수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식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아뇨, 갑자기 나온 게 아니에요. 우리는 언제나 있어왔어요. 당신들이 보지 않으려 했을 뿐이죠. 우리의 존재를 지우지 마세요.”

그는 이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다만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거.

남태령에서 한 농민이 “딸들아, 고맙다”고 하자, “딸 아니에요”라는 이들이 있었다. 농민은 “그래, 알아둘게.”라고 답했다.  정도면 충분하다.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출근시위는 여전히 안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민들이 있을 때는 직원들이 멀뚱히 딴 곳을 보다가 지하철이 떠나면 바로 위협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끊임없이 방송으로 자극하는 말을 쏟아냈고 얼굴로 카메라를 들이밀며 채증을 했다. ‘평화’는 끌려 나가지 않기 위해 5명의 동지들과 스크럼을 짰다. 하지만 경찰들에게 팔과 허리를 잡혀 들려 나갔다. 경찰은 교통약자 개찰구 밖으로 그를 우겨넣듯이 하고는 돌아섰다. 말로만 듣던 폭력적인 불법연행을 처음으로 당하면서 그는 모멸감보다 공포감을 느꼈다.

하지만 며칠 후 그는 다시 혜화역으로 갔고, 또 오이도역 참사24주기에 참석해 포체투지하는 장애인들 곁에 섰다. 어떻게 공포감을 떨쳐낼 수 있었냐고 묻자 그는 같이 차를 마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울대병원 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하고 인근의 사무실로 가 같이 차를 마셨는데 그 시간이 참 좋았다고, 절로 위로가 되었고 두려운 감정이 투쟁력으로 승화되는 걸 느꼈다고 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폭력이긴 하지만 원래 시위란 소란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민들에게 불편을 느끼게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게 하고 그 끝에 그들이 있다는 걸 인식하게 하는 것, 그게 시위의 본질이잖아요.”     



그날은 그의 최애 캐릭터인 ‘먼작귀’의 생일이어서 먼작귀라는 이름으로 기부를 했다. 충실한 덕후이기도 한 그는 모든 시위에 먼작귀 인형을 데리고 간다. 당연히 SNS 인증은 필수다. 단결투쟁 머리띠를 두르기도 하고, 밤샘농성이 있을 때는 손수건으로 이불을 덮어주기도 하는 등 소소한 재미와 귀여움을 놓치지 않는다. 밤에는 응원봉 대신 먼작귀 무드등으로 어둠을 밝힌다. 깃발도 먼작귀 관련내용이다. ‘제초 3급 자격증 소유자 모임’. 모르는 사람은 의아하겠지만 아는 사람은 알아본다.

한번은 깃발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더니 누군가가 먼작귀 인형을 깃대에 붙여두었더란다. 단결투쟁 머리띠를 한 먼작귀 인형을 거통고 농성장에 두고 왔는데 며칠 후에 신문에 나기도 했다. 또 동덕여대 집회를 알리려 나눔한 스티커가 세종 호텔 농성장에 붙어있을 때의 반가움이란, 오타쿠가 아니면 알 수 없겠지.       

그는 최애 포토카드로 인증사진을 찍는 문화처럼 시위 인증문화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시위에 대한 허들을 낮추고 싶은 탓이다. 그가 좋아하는 한 그림 작가는 그림 한쪽에 항상 수박을 그려 넣는 방식으로 팔레스타인과 연대한다. 연대를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오늘도 부지런히 SNS를 넘나든다.  

그런 그가 응원봉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자칫하면 ‘정치와 무관한 사람들’ 또는 아이돌 응원봉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쓸 수 있는 계층으로 한정지을까봐, 그 외 다른 존재들이 지워질까봐 우려스럽다.

물론 2030여성들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광장에는 이전부터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었다. 그들을 먼저 알아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는 많이 알려진 집회뿐 아니라 소규모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찾아갔다. “나 한사람이” 더 필요할 테니까. 청소노동자나 성노동자 집회에 간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릴 때 그는 인사성 바른 아이였다. 다른 어른들에게도 인사를 잘했지만, 꼬박꼬박 인사를 받아주는 사람은 청소노동자들이었다. 언젠가 그는 “선생님께 힘이 되어드리고 싶어요”라는 말을 건넨 적이 있는데, 그날 자유발언을 하면서 “그 약속을 지키러 왔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청소노동자와 연루될 줄 그때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다.

‘평화’는 “연대보다 연루에 가깝다”고 했다.

인류학자 조문영은 "연루란 잇닿고 인연을 맺으며 묶어내는 감각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가 사랑하는 먼작귀는 잡초를 뽑는 일로 먹고 사는 일용직노동자이자 농민이다. 심지어 노조도 없다. 농민 노동자와 이렇게도 연루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고 황유미 추모대회와 반도체 특별법 반대투쟁도 그와 연루된 일이다. '평화'는 성인이 되자마자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마이스터고에 지원했다. 그런데 지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반고로 옮겨야만 했다. 만일 계속 마이스터고에 다녔더라면 당연히 그도 반도체 관련 일을 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에게 일어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시위는 “무관하지 않은 당사자”로서의 연대다.     


  

“일상 속에 빛의 광장이 있으면 좋겠어요. 잠깐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에.”

반드시 파면은 될 거고, 우리가 바라는 일상은 분명 돌아올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파면이 끝이 아니다. 여전히 고공 위에 노동자들이 있고 비정규직들은 하루아침에 생계를 잃고, 여성이라고 장애인이라고 성소수자라고 차별받는 이들이 있다.

‘평화’는 “모두의 미래를 위한 일상이 아니라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안담 작가의 말을 언급하면서 “두고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만약에 두고 가더라도 우리는 분명 존재하기에 이전처럼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이미 광장을 통해 모두에게 인식되었으리라 믿는다.

동지 중 한 명이 혐오발언을 한 적이 있다. 예전 같으면 아무 말도 못했을 텐데, 그는 이제 ‘대화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는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하자 그 동지는 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수용했다. 대화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통념을 넓히고 받아들이는 것. 광장의 경험이 그 정도는 우리를 성장시켜 놓았다.  

     


그는 얼마 전 아끼던 굿즈와 시집을 ‘당근’에 내놓았다. 여기저기 후원금과 교통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여성의 날 ‘빵과 장미’를 나누기 위해 노란 장미(세월호 유가족을 위해)와 성심당 빵을 샀다. 나눔할 스티커를 만들고 투쟁템을 샀다. 나는 도대체 그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이념’을 벗어나면 다른 사랑이 보여요. 사랑을 나눌 대상이 넘쳐나거든요.”

사랑하면, 나 먹을 거 줄여서라도 꽃을 선물하고 싶었지. 웃게 해주고 싶어 없는 돈도 쥐어짰지. 어렴풋이 사랑이 기억났다.      


더 큰 사랑이 몰려오고 있다. 더 큰 사랑으로 가득한 미래가 우리 곁에 와있다(윌리엄 깁슨). 기술이 아니라 사랑 말이다.

두고 가지 않을게요. 아니, 우리를 두고 가지 마세요.  



#응원봉

#집회

#탄핵

#탄핵집회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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