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인터뷰, 핑크공주
집회에서 몇 번 그를 봤다. 다들 검은색 패딩으로 몸을 둘둘 말고 있는데 혼자 핑크색 옷을 입고 있으니 눈에 띌 수밖에. 들고 있는 작은 깃발에는 ‘전국공주연합’이라고 쓰여 있었고 응원봉도 핑크색이었다. 궁금증이 절로 일었다. 핑크 옷을 입고 공주를 자칭하는 이유가 뭔지, 공주이고 싶은데 왜 집회에 나왔을지. 핑크공주(29세, 여, 대전 서구)는 황공하옵게도 바로 내 인터뷰를 승낙해주었다.
핑크공주를 만난 날은 검찰이 제2의 내란을 획책하고 윤석열이 ‘법률상 탈옥’한 다음날이었다. 우리는 가끔 시간여행을 꿈꾼다.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만나고픈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기도 하고 타임리프를 하면서 잃고 싶지 않은 대상을 반복해 만나기도 하는 그런 꿈. 하지만 내란수괴가 다시 거리를 활보하는 일을 타임리프로 겪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탄핵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같은 일이 벌어질 줄이야. 전국민을 상대로 몰래카메라가 돌아가는 건 아닐까, 믿기지 않은 채로 하루가 지나도록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내게 핑크공주는 긴 싸움을 지속하려면 명상과 단식으로 몸과 마음을 비우면서 분노와 절망에 지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집착을 내려놓고(탄핵이 집착이라고?), 바라는 게 무엇이든(다른 것도 아닌 내란수괴 탄핵인데?) 분노와 절망을 하기보다(탄핵은 원래 분노와 절망을 똘똘 뭉친 원기옥 아닌가?) 연대와 사랑으로 묵묵히 자리를 지키면서 투쟁을 이어가야 한다는 거다. 성질 급한 나는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킬 수는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인터뷰어라는 본분을 망각하고 잠시 묵언으로 반항심을 삼켰다.
그 어떤 폭력도, 부패한 권력도 우리가 갖고 있는 따뜻한 사랑을, 온정을, 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냐고 힘주어 말했다. 집회 도중 내란수괴의 석방 소식을 듣고 다들 망연자실해있을 때여서 그의 발언은 시의적절하게 우리를 위로해주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너무 떨려서 혹시 쓰러지는 건 아닌가 걱정했단다. 우울증과 불안이 심해서 공황이라도 오면 구급차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했다. 다행히(?) 핸드폰을 보며 읽기에 급급해서 사람들과 눈 마주칠 여유가 없었다. 여기 집회에 온 사람들은 같은 뜻을 가지고 모인 거니 설마 돌 던지는 일은 없겠지, 물론 이들도 수천 가지 다른 생각을 가졌겠지만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더라도 마음을 열고 들어주려고 노력하겠지, 믿음도 있었다. 차차 떨림이 잦아들었고 무사히 마치고 나니, 다음에는 더 많은 청중이 있는 서울에 가서 발언해야겠다는 자신감까지 얻었다.
그는 테드(미국의 학술 강연회)와 같은 강의를 하는 것이 꿈이다. 그런데 왕따 트라우마와 피해의식으로 학급 30명 앞에서도 말하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우울증과 ADHD로 불안에 시달리고 있어, 일을 쉬면서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수용하려고 애쓰는 중이다. 집착을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비우는 게 절대 쉬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렵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그에게 핑크는 마음의 평화를 준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핑크로 위안을 얻고 자신감을 얻는다. 동시에 핑크는 저항의 상징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의 차림새는 평범치 않다. 정상성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만한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이 핑크로 무장한다.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을 때마다 정상성이란 다양성을 무시하고 혐오에 기반한 거라고, 누구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유롭게 좋아할 권리가 있다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사회라면 당연히 핑크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혐오에 대한 저항이라면 더더욱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목소리 높인다.
목소리를 높여보지만 저항은 반격을 동반한다. 우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날도 영화 <위키드>를 보면서 외로운 선택을 하는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펑펑 울었다. 아름다운 희생과 정의의 힘을 보며 큰 용기를 얻었다.
이제 명상하고 자야지, 하고 비행기모드로 전환하려는데 친구로부터 디엠이 왔다.
“미쳤나봐. 계엄이래.”
당연히 가짜뉴스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패닉 상태로 새벽 4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섭기도 했지만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 국회 정문을 붙잡고 밤을 지새운 사람들을 보면서 부끄러웠다. 누군가는 유서를 써놓고 왔고 누군가는 고양이 밥을 한 달 분이나 주고 왔다고 했다. 그들이 어떤 결심으로 그렇게 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이재명 대표 등 많은 분들에게 빚을 졌다는 생각에 집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상태가 나쁠 때는 잠시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죽을 것처럼 힘들지만,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일상을 벌어줬는데 토요일 집회도 못 간다면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온라인으로도 열심히 참전했다. 청원동의나 후원 등 부지런히 알티를 하고 독려하는 글을 썼다.
지금까지 14번 참석했으니 거의 개근에 가깝다. 하지만 이번 탄핵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그는 집회에 나간 적이 없다. 지난 박근혜 탄핵 때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 죽을 뻔한 거잖아요.”
설마 북한이? 했는데, 우리 군인이었다. 국민의 치안을 담당하는 이들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 그날 이후 몇 주 동안 조금만 큰소리가 나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그의 불안과 두려움은 실재하는 불안이고, 당면한 두려움이었다.
내란의 실체를 밝혀갈수록 죽음과 두려움, 슬픔과 분노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내내 울면서 12월을 보냈던 것 같다. 남태령대첩과 키세스단을 라이브방송으로 보며 그 추운 날 성스럽기까지 한 그들의 희생에 감동을 느끼던 중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가 터졌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가혹하지? 그는 안타까움과 무기력으로 1월에도 2월에도 계속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불안감이 최고조로 달하던 즈음 그는 차라리 두려움의 실체를 정확히 알자, 하는 마음으로 극우들의 뒤를 팠다. 마음만 먹으면 SNS로 못하는 게 없는 세상이 아닌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정치상황과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나니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이번 탄핵으로 그는 농민들을 알게 되었고 양곡법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이 결코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것,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대하지 않을 수 없음도 알게 되었다.
“결국 세상은 뒤로 가는 것 같아도 앞으로 간다.” 그는 다시 되뇌었다.
우리가 당도할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기본소득을 받을 수 있기를 그는 바란다.
“성인이 되는 순간 최소한 15평, 솔직히 20평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쨌든 집이 제공되고 먹고 살 기본소득이 주어져야 해요. 사람은 살만해지면 영혼이 원하는 일, 재능이 발하는 일을 하거든요. 그러면 우리 사회는 형형색색으로 더 발전할 거예요.”
그날이 멀지 않았다고 그는 믿는다. 빛이 밝으면 어둠도 깊듯이 극자본주의 뒤에는 살만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자신을 덜 해치면서, 자기파괴적 습관을 줄이고 자신을 돌보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자신을 돌보는 게 세상을 돌보는 일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앞으로 다양한 집회에 참여할 생각이다. 팔레스타인이나 장애인 관련 집회도 가고 정치토론회 등에도 가볼 예정이다. 지지하고 후원하고 연대하는 것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을 돌보고 성장하는 길이니까.
“근데요, 왜 핑크예요?”
묻고 나서 아차 싶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왜 음악이냐고 왜 게임이냐고 묻지 않았는데 왜 핑크냐고 물었을까. 핑크가 어떤 위로를 주느냐고 물었어야 했다. 여전히 어리석은 내게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핑크를 좋아하니까요. 내게는 사랑스럽게 여겨져요. 핑크를 보면 행복해요.”
행복하다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나도 가끔은 핑크가 사랑스럽다. 아니, 사랑스럽지 않은 색이 없다.
‘전국공주연합’의 참여를 원한다면 핑크를 드레스코드로!
아니, 드레스코드 따위 필요 없이 각자 원하는 색으로!
그나저나 전 국민이 명상과 단식을 하게 하는 것이 저들의 속셈이 아니라면 빨리 좀 파면시키고 다시 잡아넣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