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인터뷰, 정한새
계엄이 일어났을 때 박해울 작가의 강의에 못가면 어쩌지 라는 생각은 했지만 덕후는 아니라고 하고, 광장에는 나오지만 광장에 대단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만났다.
정한새(30대, 양성애자, 현재 백수, 대전 서구)는 퀴어 페미니스트로서 여성 작가 책읽기 팟캐스트 운영자이고 서평을 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온갖 집회에 참여했다. 노무현 탄핵반대, 효순미순이 사건, 광우병 사태, FTA 반대 등등. 성년이 된 이후에도 거리에 나가 박근혜 탄핵 등 수많은 집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밤샘농성이니 단식이니 백팔 배니 오체투지니 온갖 투쟁에 지쳐 돈을 벌기 시작하면 후원만 하지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매일 밤 광장에 서있다.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
계엄이 일어났을 때 그는 서평을 쓰고 있었다. ‘계엄이래’라는 동생의 카톡을 보고도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규과정을 이수한 자로서 단어의 뜻이야 모르지 않았지만 이게 뭐지? 하는 상태로 한동안 의미파악이 안 되었다. 현실과는 무관한, 너무 뜬금없는 단어였다.
포고령을 하나하나 읽고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 당시 외국에 나가있던 아빠가 무사히 입국할 수 있을지, 하는 걱정이었다. 이어서 이미 신청해놓은 퇴사가 잘 마무리될지, 애인에게 유독 유치하게 했던 말이 마지막 대화가 되면 어쩌지? 그리고 앞서도 말했듯 박해울 작가의 강의가 떠올랐다.
다음날 그는 평소처럼 회사에 갔고 평소처럼 하루를 보냈다. 회사에서는 계엄에 대한 이런저런 대책회의가 있었지만 그게 뭐든 계엄령을 고려한 행동은 ‘매국’이라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내란’이라는 표현을 몰랐다. 단어의 의미야 알지만 2025년에 그런 단어를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바로 그 주말, 그는 서울권을 벗어나 대전으로 이사했다. 복잡하기만 하고 쓰레기도 전기도 묘지도 타 지역에 의존하는 서울이 싫었다.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 그는 자생적인 도시에서 살고 싶었다. 조건은 딱 하나, 퀴어문화축제가 있는 곳. 대전이 적절해보였다.
이삿짐을 정리하다 우연히 대전집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 바로 집 앞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걸 보고 한고비 넘겼구나 생각했다. 100일 넘은 지금도 매 주말마다, 매일 은하수네거리로 나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람을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아서 기대가 없어요. 낙관적이지 않아요.”
인터뷰한 날은 마침 헌법재판소가 한덕수 총리를 기각한 날이었다. 검찰이 농간을 부리고 헌법재판소가 판결을 지연하면서 서울은 다시 집회 참여자가 늘었다고 하지만 대전은 이전과 다름없다. 그는 기대가 없기 때문에 참여자가 많건 적건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오늘의 판결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았다.
그런 그도 한강진 집회 때는 화가 났다. 밤새 유튜브를 틀어놓고 잤는데 새벽에 보니 그들의 머리 위로 하얗게 눈이 쌓이고 있었다.
저들의 행태가 점점 안하무인이 되어가는 걸 보면서 그는 점점 더 기대감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광장으로 나갔다.
“이게 제일 싸다.”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경찰이나 군인을 동원해서 국민을 죽이지 않는 선에서 그들을 막을 수 있다면, 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여론형성에 도움이 되고 압박수단이 된다면, 나 하나가 더 참석해서 은하수네거리에 나오는 시민들에게 위안이 된다면, 매일 집회를 해서 파면이 된다면 지금 이 방식이 제일 싸다. 어느새 집회에 대한 마음자세가 달라졌다.
그래서 그는 깃발을 만들었다. ‘한국 과학소설 독자연대.’
‘한국 과학소설 작가연대’를 패러디했다. 좋아하는 작가 이름도 써넣었다. 한국과학소설작가, 특히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 꾸준히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이슈가 나온다. 그는 거기서 안전함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이 안착할 수 있는 장르가 생긴 것이다.
응원봉은 두 개째다. 꺼지지 않는 빛이라고들 했지만, 고장이 나서 꺼졌다. 얼른 새로 사는 수밖에.
깃발을 만들고 응원봉을 꼬박꼬박 챙겨드는 것만으로 심리적으로 무장이 된다.
“1순위는 차별금지법이에요.”
이번 국면에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많은 국민들이 그동안 몰랐던, 언론이 말하지 않은 수많은 투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차별금지법도 그 중 하나다.
제발 시위 현장이 아니라 돈을 벌어 후원하는 자리에 있고 싶다고 했지만, 글을 쓰거나 누군가와 인터뷰를 하거나 선거지원을 하는 방식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는 항상 투쟁의 길 위에 있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다시 깃발을 들 수 있다. 멈추지 않고 투쟁할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헌법에 명시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법률로 따로 만드는, 어찌 생각하면 웃기는 법이다. 그래도 차별금지법이 있어야 생활동반자법의 근거가 될 수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을 요구할 수 있고 가사‘노동자’가 아닌 가사‘활동인’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노동법 적용을 회피하려는 꼼수를 막을 수 있다.
이번 광장에서 특히 성소수자가 많아진 걸 느낀다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괴리가 어디서 오는가 했더니 그는 이미 성소수자들이 낯설지 않아 익숙했던 거였다. 어떤 이들은 광장에서 노동자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했던 것처럼 나는 성소수자가 익숙치 않았다. 노동자가, 성소수자가, 여성이, 장애인이 익숙해지는 것. 광장은 그들을 내 이웃으로 익숙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집에서 혼자 여성 아니냐고. 남편과 아들 둘 사이에 혼자 소수자인 거 맞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인터뷰가 쉽지 않았다. 준비해간 질문이 거의 쓸모가 없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버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마 그가 이미 해방의 몸, 평화의 세상을 살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노동자를 존중할 줄 아는 부모 아래 평화의 세상을 경험했고, 소수자들 사이에서 해방의 언어를 습득했고, ‘기대하지 않아도’ 평생 투쟁하지 않을 수 없는 광장의 자식으로 살았다.
남태령에서, 또 이 글을 쓰고 있는 3월 26일 현재 제2의 남태령을 만들고 있는 ‘해방의 몸’들은 이미 평화의 세상을 살고 있는데, 저들만 시대를 거스르려 하고 있다.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재미없거나 원하는 내용이 아니면 실패했다고 말하는데 그건 실패가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가는 과정이에요. 왜 재미없는지 알아야 내가 원하는 책, 좋아하는 책을 고를 수 있잖아요. 윤석열을 피하려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원하고 어떤 사회를 원치 않는지 알아야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