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인터뷰, 시우-집회가 너무 신나고 재밌어요
“사회대개혁이라는 게 결국은 우리가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회는 곧 우리니까요. 결국 우리가 바뀌고 내가 바뀌어야 개혁이 되는 거죠.”
탄핵과 더불어 사회대개혁을 이루어내자는 의지가 드높다. 정치개혁, 언론개혁, 교육개혁, 성평등과 인권, 노동, 평화, 환경, 농업, 역사정의 등 다양한 분야의 개혁과제를 말한다. 그런데 시우(29세, 논바이너리, 퇴사예정자, 대전 서구)는 ‘우리’가 먼저, 그리고 ‘나’부터 바뀌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당사자’들의 말을 우리가 듣고 각자 수용하는 자세를 가지는 게 먼저다.
탄핵정국을 통해 시우는 개인적으로 많은 개혁을 이루어냈다. 그가 한 개혁들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겠다.
우선, 그는 박근혜 탄핵 때 무서워서 못 나간 집회에 나갔다. 그때는 인터넷이 갑자기 먹통이 되면 얼른 도망쳐야 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물대포와 최루탄을 쏴서 죽일 거라고들 했다. 서울이 그렇다면 지방은 더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했다. 시우는 가끔 그날을 돌이켜본다. 만일 그때로 돌아간다면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말할 수 없이 한심했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세월호 때도 그랬다. 전원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수업을 시작했다. 또래 친구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수업이 다 끝난 저녁에야 알았다. 학교에서 핸드폰을 걷어갔던 때라 어쩔 수 없었지만 몇 시간이나 몰랐다는 게 너무 미안하고 원통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이 또 한 번 쌓였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추모의 포스트잇이라도 쓰고 싶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서울에 네 번밖에 못 가본 그가 서울에 간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다. 망설이기만 하다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을 때는 왜 거길 갔느냐, 놀다가 죽은 거 아니냐는 말에 동조했다. 나중에야 경찰인력이 다른 곳으로 빠지면서 막을 수 있었던 사고를 막지 못한 거라는 사실을 알고, 한순간 든 생각으로 섣부르게 판단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다. 더 무력해졌다. 그런 일들이 계속 쌓여갔다.
그런데 계엄이 터졌다. 그는 계엄 이전에도 계엄과 같은 상황이 올 거라는 걸 알았다. 계엄을 생각한 건 아니지만,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불량식품이라도 없는 사람들은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우릴 죽일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가졌다. 그는 저소득층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게 끊기면 한순간에 죽지는 않겠지만 근근이 살아가다가 서서히 죽어가는 거다.
대전역에서 하는 집회였다.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 의지를 전한 것 같아 가슴의 체증이 조금 내려가는 것 같았다. 약간의 욕설은 있었지만 충돌은 없었다. 집회라는 게 그다지 위험하지 않구나, 안심했다.
끝날 무렵 한 정치인이 무대에 올라 “눈 뜬 장님이 칼을 휘두르고 있으니 뺏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불쾌했다. 장애인 비하 발언을 하는 그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는 게 화가 났다. 예전같으면 참고 말았을 테지만 시우는 그러지 않았다. 항의하는 문자를 보냈고 사과를 받았다. 그래도 찝찝한 마음으로 계속 가고 싶지는 않아 다른 집회를 알아봤고, 은하수 네거리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도 ‘개 돼지’에 비유하는 말들이 나왔다. 죄 없는 동물에 비유하는 것도 문제고 뚱뚱하다고 비하하는 것도 문제인데, 사람들은 웃어넘겼다. 이번에도 시우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계속 집회에 참여해서 탄핵에 힘을 보태고는 싶은데 마음에 들지는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말을 할 수밖에. 다행히 그런 발언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후로도 가끔 그런 일은 있었고 주최 측은 사후에라도 사과를 했지만 발언자가 사과하는 일은 없었다.
계엄 날, 그는 첫 출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12월 4일이 그가 원하던 웹디자인으로 취업에 성공해 회사에 가는 첫날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엄마가 “뉴스 좀 봐라” 했다. 계엄이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얼른 X(트위터)로 들어갔더니 다들 난리였다. 그의 트친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정치인은 잘 몰라도 정치사안은 그들의 촉을 자주 건드렸다. 계엄도 그런 사안이었다. 연말공연이 취소될 거고, 연예인들을 들러리로 이용할 거고, 현실과 무관한 화려한 영상은 현타를 유발하고 대중들의 분노를 자아낼 거였다. 실제로 연말시상식은 취소가 되었고 또 어떤 방송사는 그대로 진행해 욕을 먹었다. 제주항공여객기 참사까지 겹쳐서 더 그랬지만.
다음날 아침, 다행히 계엄은 해제되어 있었고 밤새 깨어있던 사람들의 소식을 살펴보며 그는 출근했다. 계엄과 무관하게 하루 일상은 이어질 터였다.
그의 예상과 달리 회사는 난리가 났다. 주로 파티와 관련된 업종이라 예약되어 있던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가 된 것이다. 그 여파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회사는 망했고, 그도 곧 퇴사를 앞두고 있다.
회사 사람들은 종일 계엄 이야기를 했고 새로운 뉴스가 나올 때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서로 묻고 확인하고 의논했다. 한 번은 탱크사진이 올라온 걸 보고 깜짝 놀라기에 그건 가짜뉴스라고, 국군의 날 행사 사진이라고 말했더니 “너는 정치에 밝은 애구나” 했다. 그 뒤로 자꾸만 그에게 물었다.
그는 원래 회사에서는 절대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했다. 잘 알지 못하는 상사들에게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건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행여 해고라도 될까 봐 무서웠다. 토요일마다 집회에 나가는 것도 철저히 숨기고 싶었다.
그런데 회사 사람들이 업무 차 집회 장소 근처로 나올 일이 생겼다. 그에게 집회에 갈 거면 잠깐 와서 도와달라고 했다. 거짓말도 못하고 거절도 못하는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집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 어차피 알게 된 거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회사사람들이 집회에 왔을 때 그는 ‘전국목성동호회연합’ 깃발을 들고 있었다. 깃발을 흔들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번에도 친구가 깃발을 만들면서 너도 해라, 해서 그냥 하게 되었다. 뭐로 할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꺼내놓고 망설였다. 목성, 게임, 마작, TRPG, 일본어, 문어, 아이브, 케이윌 등등. 친구가 그냥 목성으로 하자, 해서 그러기로 했다.
그는 미국 나사(NASA)에서 올린 목성 사진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다. ‘만약 목성이 달만큼 지구에 가까이 온다면’이라는 영상이 있는데 하늘을 거의 다 덮는 그 모습이 너무 무서우면서도 좋고 가슴이 뛰었다.
그의 네 번째 개혁이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회사사람들이 왔을 때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며 몸을 숨겼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졌다. 주최 측에서 아이브 노래를 틀어줬을 때, 아이브 노래 틀어줘서 고마워요,라고 밝히기까지 했다. 그 뒤로 항상 플레이리스트에 아이브 노래가 있었다.
처음에는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갔지만, 지금은 그가 더 적극적으로 집회에 나간다. 가끔 친구가 귀찮아할 때도 제발 같이 가줘, 하고 사정을 했다. 사람 많은 걸 싫어하고 소리가 크게 울리는 걸 무서워해서 친구 없이는 불안했다. 친구가 중요한 일정이 있을 때면 정말 난감했다. 언제까지 친구에게 매일 건가. 혼자서 못한다는 것은 꽤나 자존감 떨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다 용기를 내었다.
그는 1월에 민주노총 일반노조에 가입했다. 전국단위라고 했는데 주로 서울 위주였다. 그는 내 지역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연대를 하더라도 ‘겸사겸사’ 하고 싶다. 내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마침 구미옵티컬 노동자들이 대전을 지나갈 때 희망뚜벅이에 참여했던 것처럼.
민주노총 대전본부 담당자가 그의 말을 듣고 일반노조 대전지부를 만들어주었다. 네 명밖에 안 되는 작은 조직이지만 내 조직이 생겼다는 기쁨이 크다. 이들에게는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도 편하고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에 또 하나의 깃발을 만들었다. ‘성소수자를 차별하지 마세요! 우리의 친구일 수도 있는 게 아니라 나다! 나라고 이 자식들아!’ 길고도 당찬 내용이 담겼다.
민주노총에서 버스를 대절해 서울집회에 갈 때, 기회다! 생각하고 그 깃발을 만들었다. 서울은 아는 사람도 없으니 마음껏 흔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되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도 위험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끝날 무렵 마지막 뒤풀이(대전에서는 집회가 끝나고 기수들을 위해 노래 세곡을 틀어준다)에서 마스크를 벗고 ‘나’인 상태로 깃발을 흔들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 깃발을 흔들 수 있었으면, 앞으로도 안전한 광장으로 남았으면, 광장을 벗어나서도 거리낌 없이 나로 살 수 있었으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정도면 몇 번째 개혁인지 셀 것도 없이, 인간대개혁 아닌가.
집회에서 웅진코웨이처럼 큰 대기업이 얼마나 악랄하게 노동자를 수탈하는지 들었다. 의료붕괴가 일어나고 있는 의료현장에 대해 들었다. 노점상들이 생존권을 걸고 시위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갑자기 몇 사람이 우르르 몰려왔다. 너 인터뷰한다고? 좋겠다, 하던 친구도 있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내 친구에게 이상한 사람(?)이 말을 걸어서 보호해 주려고 달려온 것이었다. 친구들이 보호해주어야 할 만큼 그는 사람 만나는 걸 잘 못하고 혼자 칩거하며 살았다.
예전 같으면 인터뷰도 거절했을 터였다. 단 며칠 전만 해도. 지금은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게 좋다고 한다. 매일 집에만 처박혀 있던 애가 매일 저녁 갈 데가 있고, 사람들을 만나고 상기된 얼굴로 들어오는 걸 보면서 가족들도 집회 가는 걸 좋아해 준단다.
처음 구호를 외치는 걸 보며 어어, 움직임이 너무 큰데? 하며 주저주저했다며 웃었다. 지금은 잘한다. 아니 신난다.
내가 개혁되는 일이고, 사회가 개혁되는 일인데, 재밌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집회는, 개혁은 조금 무서워도 하다 보면 재밌고 신나는 일이라는 걸 알아가는 중이다. 시나브로 우리는 사회개혁으로 나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