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인터뷰, 덕후라면 정의롭고 용기 있는 캐릭터처럼 했을 테니까
2030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서울과 달리 대전은 민주노총과 함께 하는 집회라 그런지 붉은 띠와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단연 많다. 당연히 응원봉을 흔드는 사람도 많지 않고 젊은 여성도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는데, 경세(24, 여, 대학졸업반, 세종시)도 그중 한 명이다.
“12월에는 학교가 있는 전주 집회에 나갔고요, 지금은 본가가 있는 세종에서 대전으로 매주말마다 나가요." 세종은 공무원의 도시이다 보니 내놓고 집회에 나가는 게 아무래도 불편하다. 세종뿐 아니라 인근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까운 대전으로 모이는 편이다. 경세 아버지도 공무원이라 경세는 부모님 몫까지 하겠다며 동생을 데리고 대전으로 온다.
경세는 양가가 모두 전라도 집안이다. 집안 어른들도 모두 현대사의 아픔을 잘 알고 계시고, 같은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에 어릴 때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의견인 줄 알았다. 당연히 자유당은 없어졌고 독재는 청산된 줄 알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에 나오면서 그들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쩌면 경세가 어려서 몰랐는지도.
어머니는 살아오면서 내내 지역감정을 알게 모르게 겪어왔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앞에 나서는 일은 꺼린다. 이번 계엄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라도출신을 빼라는 지시가 있었던 걸 보면 어머니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라, 엄연히 현존하는 편견이고 배제이며 혐오의 민낯이다.
어머니는 경세가 집회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나가고 있는데 너까지 나갈 필요가 있냐. 그러지 않아도 윤석열은 탄핵이 될 거다”라며 경세를 말렸다.
사실 처음 집회에 갔을 때는 엄마에게 친구들과 놀러 간다고 둘러댔다. 다녀온 이후에야 서울집회에 갔다 왔다고 솔직히 말했다. 어머니는 조금 놀랐지만 요즘 집회는 예전과 달리 평화롭게 진행되어서 그런지 별말씀이 없으셨다. 이제는 집회에 다녀오겠다고 하면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할 뿐이다.
세상에는 한쪽 의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경세는 스스로 옳은 것을 판단하기 위해 늘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뉴스를 꾸준히 챙겨보았고 정치인의 행보를 자세히 지켜보았다. 정책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어느 국회의원이 냈는지, 어떤 변화가 가능한지,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한 정책은 아닌지 등을 두루두루 살폈다.
경세는 어려서부터 만화를 좋아했다. 지금은 2.5D라 하여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2D였던 것을 뮤지컬이나 연극 등으로 구현한 것을 좋아하는데, 유달리 작품 하나를 봐도 배경, 제작 일화, 배우들의 인터뷰 등을 찾아보는 성격이어서 덕질은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응원봉은 뮤지컬 <도검난무>의 연말 공연 굿즈다. 일본의 덕친이 구해주었다. 그때만 해도 그걸 광장에서 흔들 일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12월 3일, 디스코드에서 덕친들을 만나 엊그제 끝난 공연 이야기로 신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누군가가 “계엄이 발령되었대”라고 했다. 처음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다.
“무슨 계엄이야, 2024년에.” 경세는 설마 하는 마음에 뉴스를 찾아봤더니 진짜였다.
“미친 거 아냐? 어떻게 해야 돼?” 교과서나 본 계엄이 실제로 일어났다니 무서웠다. 어쩌면 유신정권 때 일어난 일들이 다시 자행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 시간쯤이면 알바를 끝내고 돌아갈 친구에게 전화부터 했다.
“나라가 망했어, 얼른 집에 들어가. 돌아다니면 너 잡혀간다.”
계엄이 있었던 주말에 경세는 민주당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의 첫 집회였다. 그날 여의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버스가 도착지점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내려 걸어가야 했다. 한마음 한뜻으로 거리를 가득 메운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그는 동지애를 느꼈다. 버스 안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을 때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 속에 월남전 참전용사도 계신 걸 보면서 행동한다는 것, 정치적 표현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다. “집회 열심히 나가야지” 결심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학교 친구들이나 덕질 친구들도 대부분 열심히 집회에 나간다. 대구에서 기수로 활동하는 친구 말에 의하면 그곳은 거리의 시선이 곱지 않다고 한다. 경적을 크게 울리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꽤 있단다. 거기에 비하면 대전은 안전한 편이다. 거리행진을 할 때면 버스정류장에 있던 시민들이 박수를 쳐주는 등 동조해 주는 분들이 많다. 감지덕지하다가도, 정치에 대한 표현을 좀 더 자유롭게 하는 분위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었다. 그러다 자신부터 솔선수범해서 정치에 대한 입장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오랜 덕질 친구들과는 이미 인간관계 고민이나 상담뿐 아니라 정치나 사회문제 등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는 편이다. 그래서 딱히 정치 목적의 다른 모임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 사실 계엄 이전에는 정치 이야기가 머리 아픈 주제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외교나 관세에 따라 직간접적으로 덕질에 커다란 타격을 주니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밖에 없다.
작년 대만에서 한 남성이 지하철에서 칼부림을 하는 범인을 제압한 일이 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속 용사를 언급하며 “용사 힘멜이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창작물은 주인공이 악으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도 고난을 헤치고 정의를 쟁취한다. 창작물 속 인물들은 다양한 입장과 소수자성을 가지고 있고, 덕후들은 이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며 공감한다.
한편으로 경세는 다양한 입장을 가진 캐릭터가 현실에서도 익숙하다. 다문화 2세나 성소수자들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다. 주변에 있는 내 친구 이야기다. 광장에 여성이 많다는 것에 놀라고 성소수자가 가시화되었다고 놀란 건 기성세대와 정치인들(그리고 나) 뿐이다.
이번 계엄에 왜 덕후들이 더 민감했는지 궁금했던 나는 많은 부분 의문이 풀렸다. 창작물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예술은 뜨거운 심장에서 나온다.
윤석열 탄핵이 되고 ‘국민의 힘’이 해체된다고 해도 끝은 아니다. 이후에도 많은 개혁과제가 기다리고 있다. 그는 최우선과제로 노인복지를 꼽았다. 노년에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지금의 노인들, 중장년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노인이 되기 때문이다. 노인복지가 먼저 자리를 잡으면 실버케어나 교통약자를 위한 시설도 많아질 것이고 다른 분야로 번져가는 시너지효과가 생길 것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 취약한 노인들에게 가짜뉴스를 구별할 수 있는 교육도 할 수 있다.
일본에 갔을 때 공항이나 놀이공원에 중장년 스텝들이 많이 보였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심각한 초고령화 사회라고 우려하는 일본인데,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공공일자리를 꽤 마련해 놓았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세대 간 단절의 문제도 더 이상 개인적 노력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노인들이 사회로 많이 나오게 하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자주 만나고 부딪혀야 서로를 이해할 기회가 생기고 노인들도 변화된 사회를 받아들이기 쉬워진다. 청년과 노인이 함께 일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경험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