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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Mar 31. 2020

제비꽃

아파트 화단에 하얀 게 잔뜩 떨어져 있다. 저게 뭔가 싶어 들여다 보니, 제비꽃이다, 흰 제비꽃. 여기저기 제비꽃은 많이 피었지만, 흰 제비꽃이 무리 지어 핀 곳은 여기뿐이다. 놀이터 바로 옆. 평소 같으면 학원에 가있을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놀이기구에 매달려 있다. 아기들과 나온 남자들도 몇 보인다. 코로나가 잠시 멈추게 해 준, 바쁘게 살았을 사람들이다.

제비꽃을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자 지나가던 사람들도 제비꽃을 쳐다본다. 뛰어가던 아이들도 곁으로 와서 들여다본다.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해 준 제비꽃이 고맙다. 세상을 잠시 멈추게 한 코로나는 분명 재앙이지만, 아무리 나쁜 일도 일면 좋은 점이 있어, 넘어진 김에 쉬어갈 수 있게 되었다. n번 방이라 칭하는 악질적인 사건도 잠시 멈춘 덕분에 우리 모두가 끈질기게 항의하고 이슈화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예전과 달리, 문제를 지나치지 않고 잊어버리지도 않고 성착취를 뿌리 뽑자고 강력하게 촉구하는 중이다. 일련의 과정에서 젊은 여자들의 인식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한 세대가 지난 후가 기대된다.


김병권 정의정책 연구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노장 버니 샌더스가 20대의 알렉산드리아 오카리오코르테르 하원의원과 손잡고 2030 청년 세대를 대표하며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나. 한국에서도 그런 80% 청년세대의 정치적 요구를 일깨울 수 있다면 한국정치도 변하지 않겠는가."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로 만들어줄 사람은 젊은 여성들이라고 믿는다.


아들 둘을 키우던 시기에는 딸 키우는 사람들이 너무 별나게 군다고 생각했다. 나처럼 살지 말고 너는 결혼도 할 필요 없이 네 능력을 펼치고 살아라, 이런 식의 가르침은 과도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들이 딸을 아주 잘 키운 듯하다. 딸들을 이렇게 키워준 이들에게 감사하다. 당신의 딸들이 사회 구성원이 되면서 사회의 온갖 추잡하고 정의롭지 못한 꼴을 그냥 눈감아주지 않고 있다. 힘내라, 여자들이여. 이제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눠지는 것처럼, 당신들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것이다.

아들만 둘인 나는 보탬이 되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다. 대신 아들들에게 항상 말한다. 여자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살라고. 너희가 모르고 누렸던 기득권을 내려놓고 깨어있는 시민으로 서야 여자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제비꽃에서 너무 멀리 갔다. 하지만 너무 먼 것은 아니다. 세상이 미쳐갈 때에야 사람들은 꽃을 들여다보고, 잠시 멈춰야 보인다는 것도 알게 되는 법이니까. 제비꽃은 봄날이 온 것을 알리는 임무를 위해 며칠간 꽃피우지만, 제비꽃의 씨앗은 1년을 또는 몇년을 기다린다. 씨앗의 목적은 꽃 피우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멈추고 기다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알아가는 것이 목적일지도. 이제 제비꽃 앞에서 잠시 멈춰, 숨어있는 것들을 자세히 보자. 언뜻 보면 네 개로 보이는 꽃잎 뒤에 꼬리처럼 말려들어간 또 하나의 꽃잎이 제비꽃을 제비처럼 보이게 하는 귀욤 포인트라는 감성도 놓치지 않으면서, 그동안 아무도 숨기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척했던 것들을 직면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알아가야 한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고 힘들었던 일상도 곧 돌아올 것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는,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정상 사회의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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